"엄마, 제발 우리 학교에 오지 마"

"-지 마"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쓰는 기사

등록 2008.03.16 16:17수정 2008.03.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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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불평해도 늘 좋은 취재거리를 제공하는 두 딸. ⓒ 한나영

입으로는 불평해도 늘 좋은 취재거리를 제공하는 두 딸. ⓒ 한나영
"제발 학교에 오지 마!"
"카메라 들고 여기저기 어슬렁거리지 마!"

 

큰딸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마이뉴스> 관련 발언은 이렇듯 늘 명령문이다. 그것도 부정명령문.

 

"애들한테 물어보지 마."

"이메일도 보내지 마."

"사진도 찍지 마."

"선생님도 만나지 마."

 

수없이 이어지는 "–지 마."

 

큰딸은 FBI 요원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 '명색이 기자'인 제 엄마의 무한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싫어한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 있었던 뉴스거리가 될 만한 얘기도 집에서는 가급적 삼가고, 혹시라도 발설을 하게 될 때는 기사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거나 협박(?)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밥상머리에서 듣는 좋은 취재거리, 예를 들면 특별한 학교 행사나 소개하고 싶은 좋은 선생님, 감동적인 수업 시간, 아르바이트 하면서 겪은 친구들의 희한한 경험, 또는 딸이 직접 겪은 흥미로운 이야기 등이 기사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큰딸의 서슬 퍼런 '검열' 탓에.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 하니. 하지만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경우에도 살벌한 검열의 칼날은 늘 번뜩인다. 무조건 싫단다. 자기 이야기 뿐 아니라 친구나 자기 학교 이야기가 <오마이뉴스> 기사로 나오는 게.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제 엄마란 사람은 본디 내성적이고 소심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러니 기사욕에 눈이 멀어(?) 활개치며 취재할 목적으로 학교를 방문할 일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카메라를 들이대면서까지 취재를 요청할 일은 더더욱 없고.

 

다만 어쩌다 학부모가 참석하게 될 학교 행사가 있으면 잊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게 고작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곁에 있는 몇몇 사람에게 묻는 게 전부이고. 

 

그리고 학교 관련 취재가 필요한 경우에는 취재를 방해하기 일쑤인 뻣뻣한(?) 딸에게 묻는 대신 직접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학교 관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곤 한다.

 

이렇게 기사를 쓰려고 할 때 나름대로 자제를 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는 그것마저도 불만이다. 어쨌건 엄마가 기자랍시고 취재를 핑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게 영 싫은 것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면 늘 습관처럼 카메라를 챙겨드는 나에게 "제발 빈 몸으로 조용히 다니라"고 채근을 한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무서운(?) 행동지침을 내리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급적 묻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말라."

 

좋은 기사를 써보겠다는 기자의 눈과 귀, 입을 다 막고 열의를 막으려는 못된(?) 심사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나는 어렵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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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카메라 좀 들이대지 마!" (두 딸의 오케스트라 밴드 오디션에 갔다가 길게 줄지어 늘어선 아이들을 찍었다. 포트 디파이언스 고등학교에서) ⓒ 한나영

"제발 카메라 좀 들이대지 마!" (두 딸의 오케스트라 밴드 오디션에 갔다가 길게 줄지어 늘어선 아이들을 찍었다. 포트 디파이언스 고등학교에서)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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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사진 좀 찍지 마!" (터너 애쉬비 고등학교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 갔다가 학교 벽에 붙은 이 학교 출신 이라크 병사들 사진을 찍었다.) ⓒ 한나영

"제발 사진 좀 찍지 마!" (터너 애쉬비 고등학교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 갔다가 학교 벽에 붙은 이 학교 출신 이라크 병사들 사진을 찍었다.) ⓒ 한나영

 

지난 번에 있었던 버지니아 주 예비선거만 해도 그렇다. 어느 날, 아이들이 학교 신문인 '뉴스 스트릭'을 가져 왔다. '뉴스 스트릭'은 비록 고등학교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지만 내용이 알차고 대단히 흥미롭다. 그래서 나는 격주로 발행되는 '뉴스 스트릭'을 즐겨 읽는 애독자다.

 

그런데 그날 학교 신문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때 마침 아이들도 식탁에서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우리 학교 애들은 힐러리를 되게 싫어해. 오바마를 좋아해."

"그래? 오바마를 좋아하는 애들은 어떤 애들이니? 혹시 흑인이니?"

"아니, 그건 인종과는 상관이 없어. 많은 애들이 오바마를 좋아해. 그리고 부모가 진보적인 지식인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해. (부모가 대학교수인) 케이티, 라이언, 페이스가 모두 열렬한 오바마 지지자잖아."

"그래? 오바마 지지자가 고학력 유권자라더니 그 말이 맞는 건가?"

 

오는 11월에 있게 될 미국 대통령 선거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10대 고등학생들에게도 중요한 이슈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사와 관련된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 이런 걸 취재해보면 좋겠구나. 투표권이 있는 미국의 10대 고등학생들은 이번 선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처음 투표를 하게 되는 새내기 유권자들의 소감은 어떨까? 아이들은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꼽고 있을까? 10대들은 어른들과 같은 투표 성향을 보일까?'

 

좋은 기사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이 아이디어는 금세 취재 훼방꾼인 큰딸이라는 커다란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 학교 애들 취재할 생각 말아."

 

난감했다. 하지만 취재는 해야 했기에 학교 카운슬러를 통해 졸업반 아이 하나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대학 1학년 학생인 새내기 유권자 48명은 아는 분을 통해 이미 여론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을 더 많이 인터뷰하고 싶었던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큰딸이 학교에 가져갈 악기가 많다고 태워달라고 했다. 그런데 학교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딸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엄마, 오늘 몇 시에 끝나?"

"왜?"

"… 책가방을 안 가져왔어."

"뭐, 뭐라고? 학생이 책가방도 없이 학교에 왔다고?"

 

어이없어 하는 내게 딸아이는 악기를 세 개(바이올린, 오보에, 잉글리시 혼)나 챙겨야 했고 늦었다고 재촉을 하는 동생 때문에 서두르다가 그만 현관 앞에 둔 가방을 잊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가방은 갖다 주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바로 이거야. 이게 바로 찬스라고.”

 

학교 행정실에서 만나 가방을 건네면서 나는 딸에게 중요한 미션 하나를 주었다.

 

"자, 여기 네 가방. 대신 이번에는 네가 엄마 일 하나 해줘야겠다."

"뭔데?"

"여론조사."

 

싫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코를 꿰인 상태인데. 

 

"어떻게 하는 건데?"

"우선 세가지 질문을 던지는 거야. 첫 번째는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 중에 누구를 지지하는지, 두 번째는 누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월 대선에서 누가 차기 대통령에 뽑힐 것인지. 또한 차기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지도 물어봐. 특이한 답변을 하는 아이들 이야기도 잊어버리기 전에 다 공책에 적어두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인터뷰 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으니까. 그 밖에 또 뭐가 있을까?"

"됐어. 그만하면."

 

가방을 들고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너, 종종 책가방 두고 가거라.'

 

그날 오후 집에 돌아온 큰딸 입에서 술술 터져 나오는 미국 10대 고등학생들의 지지 후보와 11월 총선 기상도. 

 

기자가 쓴 "부시 패밀리에 이어 클린턴 패밀리까지? 안돼"라는 기사는 이렇게 어렵사리 딸의 실수를 이용한 내 책략의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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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기사를 쓰면서 큰딸의 도움을 받았다. ⓒ 오마이뉴스

바로 이 기사를 쓰면서 큰딸의 도움을 받았다. ⓒ 오마이뉴스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는 말이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책 제목으로 써서 유명해진 아프리카 속담이다. 이 말은 아이 하나를 양육하는 데는 가정 뿐 아니라 아이가 속한 마을 전체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생뚱맞게 왜 ‘마을’ 얘기를 꺼내느냐고? 비슷하기 때문이다. 뭐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는 데도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선 가족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고 주변 사람이나 여러 취재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좋은 기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까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써야 하는 걸까. 큰딸의 앙칼진 비난 뿐 아니라 작은딸의 점잖은 면박도 사실은 만만찮은데 말이다.

 

"엄마, 내 주변에 엄마만큼 미국 대통령 선거에 관심 많은 사람 없어."

2008.03.16 16:17 ⓒ 2008 OhmyNews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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