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휴양림 가는 길에서 이야기를 만나다

[짧은 도보여행기] 마천에서 지리산자연휴양림까지, 7km를 걷다

등록 2008.03.17 16:22수정 2008.04.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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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지리산 휴양림까지 걸어 간다구요? 거기 오르막길이라 힘들어서 못 걸어요. 마천에서 내려서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에요. 택시 타고 가요."

지리산 백무동까지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마천에서 내리는데 버스기사 아저씨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우리의 목적지는 지리산자연휴양림. 마천에서 7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나는 그 길을 걸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기사아저씨가 정색을 하면서 말리는 것이다.


"7km면 걸어서 두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두 시간… 그 정도면 충분히 가겠지만…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택시 타세요."

기사아저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택시를 타라고 강조하고, 나는 알았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사아저씨한테 계속 걷겠다는 이야기를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노란색 택시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지리산 자연휴양림을 예약한 것은 지난 2월 중순. 여러 곳의 휴양림을 다녀봤지만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걷거나 하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특히 지리산자연휴양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찾아가기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더더욱 걷고 싶었다.

대중교통 이용해서 지리산자연휴양림 가기


알아보니 교통편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지리산 백무동까지 가는 고속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고속버스는 하루에 여섯 번 운행한다. 마지막 차편은 심야버스로 자정에 출발한다. 무박2일이거나 1박 3일의 여행을 할 작정이라면 편리할 것 같다. 단, 심야할증요금을 받는다.

고속버스 표는 하루 전에 예매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서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본다. 하지만 신용카드로 예매가 안 되는 건 불편하다. 좌석 자리까지 지정해서 예약을 할 수 있지만 온라인으로 송금을 해야 한단다. 버스터미널까지 가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송금하러 은행에 가야 하는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토요일 오전 8시 20분 첫차. 좌석이 없을 것 같아 예매를 했건만 자리는 충분했다. 우등고속버스라 자리가 넓다. 소요예정시간은 3시간 20분. 참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탄다.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함양까지 쉬지 않고 달려간다.

함양까지는 고속인데 함양을 벗어나서는 완행으로 둔갑한다. 인월에서 한 번 쉬고, 지리산 실상사 앞에서 한 번 쉬고, 마천에서 쉰다. 최종목적지는 지리산 백무동.

함양에서 승객의 대부분이 내려 좌석이 많이 비었다. 백무동까지 가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마천에서 내릴 때 기사아저씨는 택시를 타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알았다고, 고맙다고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시간은 12시. 3시간 40분 만에 도착했다.

지리산자연휴양림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내일 서울로 돌아가는 차편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버스시간표가 붙어 있는 작은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간이매표소였다.

"내일 서울 가는 버스표 예매해야 하나요?"
나이든 슈퍼의 쥔아저씨가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표가 없을 수 있으므로 사야한다고 알려준다. 일정을 얼추 따져보고 일요일 오후 4시 10분 버스표를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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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소방서. 간판 아래에 산악구조대라고 써 있다. ⓒ 유혜준


버스표는 예매가 필수!

자, 이제부터 지리산자연휴양림을 향해서 힘차게 출발. 조금 걷다보니 표지판이 나온다. 자연휴양림까지 7km. 그 정도라면 아무리 오르막길이라고 하더라도 2시간이면 넉넉잡고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시간을 계산한다. 점심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버스 안에서 간식을 먹은 터라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준비했다.

걷다보니 2층짜리 새 건물이 보인다. 거창소방서다. 함양군 마천면에 거창소방서? 소방서 간판을 보니 아래쪽에 '산악구조대'라고 써 있다. 지리산 가까이 왔다는 실감이 난다. 나야 휴양림에 온 거니 산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지리산은 골이 깊으니 길을 잃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구조대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잘 포장된 도로와 새 건물을 보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왔다는 실감이 안 난다. 서울 변두리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금 걷다보니 중학생 몇 명과 초등학생 몇 명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학교가 파해서 집으로 가는가 보다.

천천히 걷다보니 퇴락한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담 위로 보이는 화림재(華林齋)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파란색 기와는 니스 칠이라도 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붕만 살아서 퍼덕이는 것 같다. 대문의 기와 위에는 잡풀이 나 있다. 호기심이 생긴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도 잡풀이 가득하다. 사람의 흔적이 끊긴 지 오래라는 느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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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재. ⓒ 유혜준


보통 현판은 건물의 가운데에 걸려 있는데 이 집은 한쪽 끝에 붙어 있다. 마당에 서서 집을 둘러보려니 대낮인데도 스산한 한기가 느껴진다. 빈집이라서 그런가. 이럴 때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상책.

마천중학교가 보인다. 새 건물이다. 역사가 짧은 학교인가? 부지를 옮겨서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옆에 마천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한쪽에 노란색 버스가 서 있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은 스쿨버스로 통학을 하는가 보다.

선유정과 문바위, 표지판이 서 있는 곳을 지난다. 선유정의 유래를 읽어보니 선녀와 나무꾼이야기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벗어놓은 옷을 나무꾼이 숨겼고, 둘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단다. 하지만 날개옷을 다시 찾은 선녀는 아이들과 나무꾼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남겨진 아이들과 나무꾼은 선녀를 그리워하다가 그만 바위가 되었단다. 선녀는 비정한 어미였나 보다. 자식들을 버리고 혼자 하늘나라로 돌아가 버렸으니. 하늘나라에서 바위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선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유정과 문바위의 유래... 선녀는 비정한 어미였다


표지판을 읽은 뒤 정자에 들러 보려고 가는데 그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무언가를 하던 아주머니가 어딜 가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랐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무도 없는 줄 알았을 거다.

아주머니는 선유정에는 못 들어간다며 "거길 왜 못 들어가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들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한다. 그러면서 토종꿀 있으니 사라는 말을 후렴처럼 덧붙인다.

걷다보니 작은 표지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건강혁신 걷기운동 1.5km 반환점', 이곳에서도 걷기운동을 장려하는 행사를 하나보다. 요즘 걷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걷기에 좋은 길을 알려주는 기사나 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걷다보니 배가 고프다. 길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평평한 바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봄빛이 따뜻하다. 서울에는 황사가 불거라고 했는데 지리산 아래는 봄이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상큼하다.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고, 밥이 맛있다.

다시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서다 보니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둘이 낚싯줄을 만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얼 잡는 거냐고 묻자 "꺽치"라고 크게 대답한다. 능숙하게 낚싯줄을 만지는 것을 보니 초보는 아닌 것 같다. 제법 잡히는 편이란다.

토요일 오후에 꺽치를 잡으러 나온 아이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그런지 정겨워 보인다. 순전히 도시적인 시각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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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치 잡는 아이들 ⓒ 유혜준




낚시 하러 나온 아이들을 만나다


영원사루트 안내도가 보인다. 만든 지 오래인 듯 지도가  빛바래 있다. 빨치산들이 토벌대의 추적을 피해 은신해 있던 비밀루트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설명 양 옆에 기관총과 완전군장을 한 군인이 그려져 있다. 

자동차를 탔더라면 그냥 휙 지나치고 말았을 표지판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가고 있다.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흐르는 것 같다.

두터운 겉옷을 벗은 가벼운 옷차림인데도 걷다보니 땀이 조금씩 차오른다. 그렇다고 더운 건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싱싱하다. 매연으로 찌든 도시에서 벗어났다는 실감이 팍팍 난다. 고속버스 기사아저씨 말대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힘들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든다. 이 정도를 걷고 힘들다고 하면 그건 엄살이 분명하다. 아니면 평소에 전혀 걷지 않았거나.

포장된 도로 위를 자동차들이 띄엄띄엄 지나간다. 한적한 시골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마천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던 노란색 버스가 내 앞을 휭 지나가더니 저 앞에서 아이들 셋을 내려놓고 간다.

실덕마을이라는 표지석 앞을 지나는데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편편한 돌 위에 걸터앉아 햇빛을 쏘이고 있다. 마을을 지나 한참 올라가다 보니 길옆에서 갑자기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꿩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다.

마을에서 아이 셋이 강아지 한 마리와 뛰어내려오다가 나와 마주치자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낯선 사람인데도 전혀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강아지도 덩달아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어댄다. 이런 정경,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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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음정마을 표지판. 작은 장승들이 여럿 서 있다. ⓒ 유혜준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에 삼정음정마을 표지판이 서 있다. 나무로 깎은 작은 장승들이 그 옆에 같이 있다. 장승들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음정마을 쪽이 지리산자연휴양림 가는 길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고속버스 기사아저씨는 오르막길이라 걷기 힘들다고 했지만 별로 힘들다는 생각 없이 걷고 있다. 이대로 한참을 더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캡스경비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대문이 보인다.

드디어 지리산휴양림에 도착

지리산 골짜기에도 경비를 삼엄하게 해야 하는 집이 있구나.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문 사이로 잘 지은 삼층집이 보인다. 집 마당은 바위와 인공조형물로 잘 꾸며져 있다. 누구네 집일까? 궁금하다.

오르막길 위로 '반갑습니다. 지리산자연휴양림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앗 벌써 도착이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길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신경질적으로 울어대는 새소리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두 마리 새가 싸우는 소리?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는 간데없고 물이 삐어져 올라오고 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물 올라오는 소리가 새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것이다.

휴양림 관리사무소 앞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니 2시 40분이 조금 지났다. 마천에서 이곳까지 2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예상보다 삼십 분이 더 걸렸지만 그 정도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걸어올라 왔다고 하니 웃는다. 그러면서 더워 보이는지 물을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달라고 하자 휴양림 로고가 박힌 잔에 물을 따라 건넨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켜니 뒷맛이 달착지근하다. 어, 물이 아니네. 고로쇠수액이란다. 그 말에 한잔 더 얻어마셨다.

관리사무소에서 체크인을 하고 쓰레기봉지 2개와 함양군 안내지도, 휴양림 안내도를 건네받으니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난다. 자동차를 타고 힘 안들이고 온 것보다 뿌듯하다.
#경남 #함양군 #지리산 #휴양림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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