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박정희 할머님 두 번째 이야기책인 <나의 수채화 인생>.
미다스북스
- 책이름 : 나의 수채화 인생- 글ㆍ그림 : 박정희- 책만든곳 : 미다스북스(2005.3.31.)- 책값 : 13000원 (1) 손과 얼굴과 하얀 빛
안양에 볼일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사람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어쩐지 사람들 얼굴에 자꾸 눈이 갑니다. 손에도 눈이 가고, 하얗게 드러낸 종아리나 허벅지에도 눈이 갑니다. 그러다가 제 손을 들여다보고, 뒷간에 있는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곰곰이 살핍니다.
때는 바야흐로 삼월하고도 스무 날을 넘기는 때. 지난해까지만 해도 삼월에 한 차례 눈보라가 치고 나서야 따순 기운이 돌았는데 올해에는 삼월 눈은 찾아오지 않을 듯한 느낌. 벌써부터 반소매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이 생겨나고, 자동차 에어컨 돌리는 사람도 있고.
..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밖의 일을 보고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정색을 하고 앉으라더니, “나, 왜 살아?”라고 물었다. 남편의 그 말에 무어라 얘기를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준엄한 표정 앞에 나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의 명령으로 사는 거지요. 당신은 팔십 평생 참 좋은 의사로 수고 많이 했고, 이제는 머리도 몸도 늙고 망가져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지요. 먼저 하나님께로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 (6쪽)무릎이 맛이 가고 왼어깨가 나가고 오른팔꿈치도 반편이가 된 가운데 먹통인 오른손목도 내 손목 같지가 않은 지금, 다문 1분 자전거를 타도 네 군데 다섯 군데에서 아이고 아야 엉엉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합니다.
한창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면서 살던 때에는, 고무신 안쪽 발가락과 발바닥만 하얗고 나머지 몸뚱이는 죄 새까맸는데,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된 지금은 ‘살갗이 참 하얗네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도서관 지키랴 천막농성 하랴, 길에서 햇볕 쬐며 움직일 일이 없어진 요즘이니, 싫디싫은 허연 얼굴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이 진저리가 쳐집니다. 햇볕을 쬐며 일하고 싶은데. 햇볕 쬐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해도, 낮에는 햇볕을 쬐면서 돌아다니고 싶은데.
.. 행복이라 느끼면서 살다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주었던 사랑을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나에게 베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라는 권위로 혼내고 다그치기보다는, 함께 즐기고 어떻게 하면 서로 즐거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 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이에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은 추억들이 너무나 많다 .. (39쪽)
〈평안수채화의 집〉 지킴이 박정희 할머님 |
인터넷방 : http://ilovegrandmother.com
..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 둘째 딸로 태어난 박정희 할머니. 언제나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 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마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로 세 해 동안 일하기도 했다. 1944년 평양의전 출신 내ㆍ소아과 의사 유영호와 혼인,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4녀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ㆍ25를 겪었고 1ㆍ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과 함께 23명이라는 큰식구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이 1949년 지금 자리(인천시 화평동)에 평안의원을 열었고 1952년∼63년 사이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알뜰한 마음으로 육아일기를 쓰게 고르게 되었다. 박정희 할머니는스무 해 남짓 유치원 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현역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단출하게 살면서 그림 지도, 육아일기 강좌 들을 하면서 바쁘고 즐거운 늘그막을 꾸미고 있다. 한국수채화 협회 공모전에 여러 차례 입ㆍ특선을 할 만큼 다채로운 화가 경력을 쌓은 박정희 할머니는 여러 차례 개인전을 비롯해 현역 수채화가인 큰딸 명애와 수채화 모녀전을 열기도 했으며 현재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박정희 할머니는 지난 1997년 장애인의 날에 장님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도 있다 .. (박정희 할머님 해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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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제 살결은 허연 편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똑같이 바깥에서 뒹굴며 놀아도 동무들은 금세 까맣게 그을리는데 저는 허여멀겋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늘을 부러 찾아가지 않고 그냥 땡볕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노는 데에도 살갗이 잘 타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하얀 얼굴이라고 해서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휴가를 받아 한두 번 세상 구경을 할라치면 ‘꼭 도적놈 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부대에서는 ‘얼굴 허연 놈’ 소리를 듣습니다.
책만 읽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그다지 안 많은 사람임에도, 또 책읽기보다는 밖으로 나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사람임에도, 얼굴이 허여니 책상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팽이로 여기는 눈길이 달갑지 않습니다. 남들 눈길이 어떠하든 제 나름대로 살면 그만일 텐데, 저부터 사람 보는 눈길에서 홀가분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잘 그을렸다고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얼굴이 허옇다고 해서 못난 사람이 아닐 텐데,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얼굴 허연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대접을 해서 무척 꺼려졌습니다.
.. 초등학교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나는,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어린이가 질색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한글도 모른 채 선생님께 맡기고 싶었다 .. (76쪽)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 얼굴은 저보다 훨씬 허여멀겁니다. 안양에 닿아 찾아간 사무실에서 일하는 공무원들 얼굴은 더더욱 허여멀겁니다. 아주머니 할머니는 얼굴에 허옇디허연 화장품을 바르고, 젊은 아가씨도 얼굴에 하얗디하얀 화장품을 바릅니다. 얼굴 하얀 서양사람처럼 되어야 살결 곱고 예쁜 사람으로 보인다고 느껴서 이리 할 텐데, 서양사람도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은 살결이 까무잡잡합니다. 기록사진으로 남아 있는 1900년대 첫머리, 또는 1800년대 끝머리 서양사람들 살결을 보면 우리가 ‘깜둥이’라고 하는 사람들 살결하고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화기 무렵 우리 나라 백성들 사진을 살펴보면 모두들 까만 얼굴에 까만 손에 까만 발입니다. 이 무렵 임금과 높은 신하들 사진을 살펴보면 퍽 허여멀건 얼굴에 허연 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