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층짜리 아파트인천에는 70년대에 지어진 5층짜리 낮은 아파트가 곳곳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들 재개발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다지 높지 않아 햇볕 골고루 들고, 놀이터도 널찍하여 아파트뿐 아니라 동네 사람도 함께 쉴 수 있는 터전을 없애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최종규
.. 흙이 있는 데는 어디든지 땅강아지가 있었다. 마당에도 있고 담부랑 밑에도 있고 집 뒤에도 있고 집 앞에도 있고 밭에도 있고 길에도 있고 강변에도 있고 묵은땅에도 있고 논두렁에도 있고 숲에도 있었다 .. (땅강아지/138쪽)열다섯 동으로 이루어진 다섯 층짜리 아파트에는 큰 놀이터가 둘 있었습니다. 한쪽은 모래밭으로만 제법 길게 이어져 있어서, 이곳에서는 공차기도 하고 공치기도 합니다. 먼저 와서 찜 하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곤 해서(어차피 같이 놀게 되기는 하지만), 학교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집에 책가방 던져놓기 앞서 먼저 찜해 놓는 아이가 있기 마련. 넓은 모래밭을 차지하지 못하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금 좁은 모래밭을 차지. 이곳도 차지하지 못하면, 1동부터 8동 사이로 퍽 널찍하게 나 있는 찻길이 놀이터. 여기도 차지하지 못하면, 차가 가장 적게 서 있는 동과 동 사이가 놀이터.
중학교에 들어선 1988년까지도 집에 차를 모는 사람이 드문 우리 동네라서, 우리들 놀이터는 언제나 넓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도 많지 않은 아파트마을에 웬 빈터를 그리 넓게 마련했는가 모를 일인데, 인천 시내에 있는 다른 5층짜리 아파트도 동과 동 사이 빈터는 모두 넓었어요.
.. 아무리 추워도 사흘만 견디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희망 때문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나흘이 따뜻하면 사흘이 아무리 추워도 견딜 만하였다. 견뎌내기만 하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였다 .. (삼한사온/127쪽)이렇게 모래밭 놀이터를 차지하면서 공차기를 할 때는, 발이 푹푹 빠지니 제대로 달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며 신이 나서 달리고 찹니다. 야구놀이를 할 때에는 뜬공 잡기 힘들고 튄공 잡기 버겁지만 좋다고들 뛰고 치고 북적댑니다.
하드볼이 아닌 테니스공으로 했으니 유리창 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요즈음 아파트처럼 툇마루 통유리를 한 집이 몇 군데 없었기에 파울을 치면 툇마루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이때는 공을 친 아이가 그 집을 찾아가서 딩동딩동 단추를 눌러서 공 꺼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허구헌날 여러 차례 공 꺼내기 해 주어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우리들 개구쟁이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공을 안 꺼내 주겠다고 하면서 욕설이나 큰소리가 나왔고, 공 들어간 집이 1층이나 2층이면 몰래 담벼락을 타고 들어가서 꺼내오곤 하는데, 그러다가 수위 아저씨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죽도록 얻어맞거나 안 붙잡히도록 내빼기.
동과 동 사이에서 야구를 할 때는 포수가 없이 벽을 포수 삼고 분필로 스트라이크존을 그립니다. 여기에 들어가면 스트라이크. 안 들어가면 볼. 그런데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벽치기 대상이 되는 1층 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딴 데 가서 놀아!”하고 빽 소리를 지르니까요.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는 으레 2층이나 3층 또는 4층이나 5층까지도 공이 들어갑니다. 어쩌다가 옥상에 공이 올라가면 이때에도 수위 아저씨가 있나 없나 두리번두리번 살핀 뒤 살짝 옥상문 열고 들어가서 공을 주워 옵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옥상에는 못 올라가게 하지만, 이 옥상에 올라가서 공을 주울 때면 우리 아파트마을 오른편에 있는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에 있는 제2부두가 내려다보입니다. 공을 줍고 나서 한참 동안 큰 짐차와 컨테이너차를 구경합니다. 타워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집어서 큰 짐배에 싣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수위 아저씨가 저를 보고 꽤액 하고 소리를 치면, 부리나케 옥상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어디엔가 숨습니다. 이윽고 다른 동무들이 ‘아저씨 갔다’는 신호가 나오면 조용히 나와서 다시 벽치기 야구놀이를 하고.
.. 웬만한 마을 바위는 모두 이름이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들은 대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는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이런 식으로 들어 알기도 했을 테지만,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한테 들어 알기도 했을 것이다 .. (바위/101쪽)모래밭에서 동 대항 야구놀이를 하던 어느 날, 우리 형이 타자로 나온 모습을 보고는 뒤에서 응원한다고 촐싹거리다가 야구방망이에 귀가 맞아서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기도 했습니다. 이날 형은 집에서 구두주걱이 부러지도록 얻어맞고, 야구놀이는 파장이 되고, 저는 너덜거리며 아픈 귀를 잡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엉엉 울기만 하고.
열흘쯤 앞서 오랜만에 형과 형 옛동무를 만나서 신포시장에서 순대 한 접시 시켜 놓고 소주를 마시다가 옛날 제 귀 떨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은 “야, 너 때문에 내가 집에서 얼마나 맞은 줄 알아?”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때 아버지한테 얼마나 모질게 혼이 났을까요. 참 미안한 옛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