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1번지 산청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꿈꾸다

그렇게 다가오는 남도의 봄

등록 2008.03.26 14:30수정 2008.04.0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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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의 고장 산청

a 지리산 남도 지리산

지리산 남도 지리산 ⓒ 이희동


3월의 첫째 주,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그녀의 고향 산청. 오랜만에 그녀의 부모님도 뵙고 지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자 떠난 길이었지만, 남도에서부터 들려오는 봄소식에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웠다. 아직 봄꽃은 이른 계절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춘삼월 아니던가! 고속버스 창밖 풍경은 드문드문 아직 겨울을 채 벗지 못했지만 일체유심조라고 그 모든 것이 다가오는 봄을 알리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경남 산청 도착. 내가 서 있는 곳이 산청이라는 사실에 난 묘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10년 전부터 시간만 되면 배낭을 둘러매고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산청은 3년 전 지리산 종주의 하산지로 버스 정류장에 잠깐 들른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들렀을 때 느끼는 그 설렘이란. 게다가 이곳은 지리산의 동네 함양·산청 아니던가.

어렸을 때부터 지리산을 동경해왔던 만큼 함양·산청은 내게 매우 익숙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도시락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은 아껴두다가 나중에 몰래 먹듯이 그곳은 언젠가는 꼭 한 번 들러야 할, 그리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가슴 속에 담아야할 그런 공간이었다. 과연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남명의 기개와 빨치산의 끈기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까?

산청읍내는 역시 예상한대로 매우 작았고 아기자기했다. 때마침 5일장이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과 자동차가 한 길에서 얽혀 한데 굴러가고 있었다. 차가 와도 피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재촉하지 않는 자동차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여유로웠고 평화로웠으며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마냥 따뜻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태어나 자란 대도시 서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내가 가장 먼저 가졌던 감정은 낯섦이 아니라 부러움이었다.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시와 달리 모두가 이웃사촌인 그곳 주민들은 대형마트의 일괄적인 상품보다는 이웃이 내놓은 사람냄새 나는 물품을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는 일상.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산청의 모습이 내가 꿈꾸고 있는 공동체의 전제인지도 모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서 다리만 건너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적당한 규모의 공동체여야 내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나의 주체로서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회.


물론 혹자들은 IT의 발달로 직접민주주의가 곧 실현되리라 주장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정보의 소유에 따라 사회가 급격하게 양극화 되어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20대 80의 사회를 넘어선 1대 99의 승자독점사회. 이런 처절한 현실 속에서 한가로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산청의 모습은 내게 하나의 판타지였다. 

산청 읍청정


a 읍청정 전경 명당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고가

읍청정 전경 명당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고가 ⓒ 이희동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산청 읍청정이었다. 점심 먹으로 가는 길, 창밖 경호강변에 웬 기품 있는 한옥 한 채가 동떨어져 그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가 했더니 바로 그것이 읍청정이라는 것이다. 산청에 내려올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하긴 산청하면 지리산만 떠올리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었겠는가.

고택에 다가가니 그 앞에 친절하게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안동 권씨 33세손 권두희 선생이 지은 정자로, 조상의 얼을 받들고 고을의 번영과 화목을 기원하며 각지의 유학자와 학문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지었다…(중략)…1917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9년에 완성된 이 정자(중략).”

안내판은 이밖에 건축양식을 늘어놓았지만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나 같은 문외한에겐 다 똑같이 어려운 전문용어일 뿐, 나의 눈에 띈 것은 오직 이 건물이 1919년 안동 권씨 33대손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뿐이었다. 1919년 안동 권씨가 지은 건물이라.

한마디로 수상했다. 과연 안동 권씨들이 그 음험한 시기에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조선말 세도정치를 통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냈던 그 명문 사대부가가 일제 강점기에 이리도 풍수 좋은 곳에 읍청, 시 한 수 읊겠다고 멋들어진 정자를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1919년이면 중앙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여파가 늦게나마 이곳까지 이르렀을 터, 혹 일제와 손잡은 친일파들이 독립운동의 싹을 꺾은 뒤, 그 축하주를 이곳 읍청정에서 마신 것은 아닐까?

a 읍청정 이락문 1919년 무엇을 즐기기 위함일까?

읍청정 이락문 1919년 무엇을 즐기기 위함일까? ⓒ 이희동


안내판에는 각지의 ‘유학자’라고 표현했지만, 신사상이 물밀처럼 들어오던 당시 결국 유학자란 각 지방의 토호세력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질 만큼 아직 완벽하게 조선을 접수하지 못한 일제는 이들을 통해 전국 구석구석 그들의 세력을 뻗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밤낮없이 술판이 벌어졌을 이 읍청정을 보면서 읍소할 곳을 찾았을 것이며, 나라 잃은 이들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읍청정 위에 올라 주위 경관을 바라보니 그 풍경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읍청정 밑으로 휘감아 도는 경호강과 그 옆으로 병풍같이 서 있는 절벽에 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듯 했다. 특히 저 너머 산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기거했다는 전설을 듣고 나니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아마도 100년 전의 선인들은 300년 전의 전설을 떠올리면서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최근 래프팅 관광으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산청 경호강. 지자체에서는 안 그래도 이 읍청정에 대해서 이전이나 정비를 고려하고 있다던데, 그 일환으로서 읍청정이 지역사회에서 가졌던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세력들 간의 권력구조가 좀 더 명확하게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산청 남사마을

a 남사마을 입구 장원급제를 뜻하는 회화나무

남사마을 입구 장원급제를 뜻하는 회화나무 ⓒ 이희동


읍청정을 나와 들른 곳은 성주 이씨와 전주 최씨의 고가가 자리한 산청 남사마을이었다. 그곳은 전국 유수의 마을들이 그렇듯이 오래된 돌담길 등으로 유명한 산청의 주요 관광지로서 이미 많은 언론들에 의해서 소개된 바 있다.

아마도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이나 고택이 관광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디카의 상용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위 출사가 시대적 흐름이 됨에 따라 많은 이들이 다시금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중 ‘공간’은 쉽게 찍을 수 있는 동시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주요 테마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공간(空間)’이 그냥 ‘비어있는 사이’가 아니라 그곳을 만들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그 자체임을,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알게 되었다. 60~70년대를 떠올리는 오래된 서울의 뒷골목과 사람냄새 나는 재래식 시장 등이 디카족들에게 각광을 받는 것은 그만큼 그 공간이 많은 사연을 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남사마을의 이씨 고가를 찾아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돌담길 양 옆에서 X자로 교차되어 늠름하게 뻗어있는 회화나무였다. 조선시대 장원급제를 배출한 동네에 심는다는 회화나무는 그 이씨 집성촌이 과거 녹록치 않은 가세를 자랑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 나무를 타고 놀면서 입신양명의 꿈을 꾸었을까.

그러나 이씨 고가는 초라했다. 물론 건물만으로 보면 아까 보았던 읍청정 저리가라였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관에서 관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씨 고가는 과거의 생기를 잃고 있었다. 

a 최씨고가 들어가는 길 높은 담장에 위용을 갖춘 고가

최씨고가 들어가는 길 높은 담장에 위용을 갖춘 고가 ⓒ 이희동



a 최씨고가의 대문 해학적인 대문 문걸이

최씨고가의 대문 해학적인 대문 문걸이 ⓒ 이희동


반면 최씨 고가는 이씨 고가와 달리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의 높은 돌담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위압감을 선사했지만, 막상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친 고택은 그야말로 고색창연함 그 자체였다. 역시 집은 사람이 그 안에 살아 본 기능을 잃지 않아야 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인가.

최씨 고가는 말 그대로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었다. 공간 곳곳에는 그냥 관리비나 주고 마음 편히 살기 위해 아파트를 선호하는 작금의 현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멋이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만큼 불편하겠지만 그만큼의 자부심이 뒤따를 것이다. 옛 것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실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위이다.

산청의 지리산

남사마을을 나와 저 멀리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지리산으로 향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리산으로의 발걸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순례다.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지리산 행. 오늘은 그 여정에 남명의 무덤과 기념관이 놓여 있다고 한다. 과연 산청 지리산 밑에서 세상을 일갈했던 남명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마을에서 얼마나 갔을까? 어느 산줄기가 지리산인가 싶더니 이윽고 지리산 천왕봉이 그 낯익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워낙에 많은 이들이 오른 까닭에 꼭대기의 바위들이 흘러내려 그 머리가 하얗게 변했는지라 천왕봉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a 지리산 천왕봉 남명의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

지리산 천왕봉 남명의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 ⓒ 이희동


그리고 바로 그 자리, 남명의 무덤과 기념관이 있었다. 천왕봉을 보며 호연지기를 닦았다더니 그곳은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소박했을 남명의 처신과는 달리 그의 무덤과 기념관은 역시 크고 화려했다.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크고 화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무식한 후예들의 짓이었다. 그것은 말로만 남명을 기릴 뿐, 정작 그가 무슨 고민을 했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한계리라.

그러나 나의 남명의 대한 이런 생각은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를 듣고 다시금 되새김질해야만 했다. 남명이 평생에 천왕봉을 열 번 넘게 다녀왔는데 그것이 모두 가마를 타고, 기생을 앞세우고 다녀왔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그 유명한 성리학자가 지금처럼 자력으로 천왕봉에 오를 리는 없을 터.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겠지만 남명을 생각하면서 계급사회 조선을 떠올리지 못한 건 분명 나의 한계였다. 가마를 타고 간 천왕봉과 직접 걸어 올라간 천왕봉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조선시대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떠올릴 때에는 이와 같은 계급적 한계까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화려해 거부감이 들었던 남명 관련 유적지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지리산으로 들어선다. 저번 주만 하더라도 중부지방의 꽁꽁 얼어있던 겨울 계곡을 보았건만 이곳 남도 지리산의 계곡은 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

a 지리산 대원사 지리산 종주의 종착점

지리산 대원사 지리산 종주의 종착점 ⓒ 이희동



a 지리산 대원사 계곡 졸졸졸 봄이 흐릅니다

지리산 대원사 계곡 졸졸졸 봄이 흐릅니다 ⓒ 이희동


계곡을 오르다 보니 지리산 대원사가 나왔다. 3년 전 지리산 종주 당시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내려갈까 대원사 계곡으로 내려갈까 한참을 고민했던 바로 그 대원사였다. 지리산 종주의 종점 대원사. 바래봉으로부터 시작해 노고단을 찍고 대원사로 내려오는 태극종주가 내가 꿈꾸는 지리산 종주의 최고 노선이다.

아직 벌거벗은 겨울산 속에 폭 파묻힌 형상이 부산 금정사를 떠오르게 하였던 사찰은 그 산세에 비해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 거의 모든 전각이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서 그만큼 고풍스러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옆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끄러운 공사현장은 산사의 고즈넉함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사찰 밑의 유려한 계곡만이 실망스러운 나의 마음을 달랠 뿐이었다.

대원사를 나와 다시 산청읍내로 향한다. 꽤 시간이 늦고 산이 높았음에도 해는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길옆 딸기밭의 진한 향기가 행인의 발걸음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남도는 그렇게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a 딸기밭 냄새가 진동하는 딸기밭

딸기밭 냄새가 진동하는 딸기밭 ⓒ 이희동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산청 #지리산 #읍청정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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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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