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등이 만든 자격루(물시계)를 개량한 중종 때의 보루각 자격루. 서울 덕수궁 소재.
김종성
드라마 속의 장영실은 이미 반정부 혹은 반체제에 가담해 버렸다. 게다가 그가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제공한 무기가 충녕대군을 겨누기까지 했다.
"노비 출신이니까 사회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천재적인 노비였으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조선사회의 전복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시 조선사회가 건국 초기였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국 초기는 일반 평민들에게는 '기회의 시대'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나 치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 재벌 혹은 대기업가로 성장한 사례가 많이 나타난 시기가 대한민국 건국 30년 이내였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이 채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농민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신분이 세습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난다.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도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시기였다.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때였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미천한 관노들이 능력을 바탕으로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사례가 많았다. 평양 관노 김인(金忍)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굳이 반정부 혹은 반체제를 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있었다.
장영실이 반정부 세력에 가담? 상식밖 설정건국 초기에 반정부나 반체제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전 시대의 특권층이거나 혹은 지식인 계층이다. 천민이나 평민에게는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건국 초기의 조선체제가 막 무너진 고려체제보다 더 진보적인 점을 고려할 때에, 조선체제에 대한 평민 혹은 천민들의 인식은 저항심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장영실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인재에 목마른 신왕조는 장영실의 출신성분보다는 그의 능력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조건 속에서 장영실이 체제에 친화하지 않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고를 했을 것이라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그 근거가 될 최소한의 사례라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영실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혈통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중국 강남 출신의 귀화인과 한민족 출신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귀화인들은 현지 사회의 주류문화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기 마련이다. 귀화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은 주로 현지 사회의 제도권이다. 귀화 1세대가 현지 사회의 반체제를 동경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다.
장영실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영실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면, 그가 조선 체제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하는 내면세계를 지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그가 살았던 시기가 건국 초기의 혼란한 기회의 시대였고 또 그가 현지문화를 지향하는 귀화인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 장영실이 고려황실 잔존세력 같은 저항조직에 가담했다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뭔가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둘째, 장영실의 외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왜곡 <대왕세종>에서는 양녕의 폐위가 임박하고 태종의 양위가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하는 장영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영실은 태종때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평양 관노 김인과 마찬가지로 장영실 역시 태종이 스카우트한 과학기술자였다.
장영실은 태종이 보호하던 사람<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자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출중했기 때문에 태종이 그를 특별히 보호했다고 한다.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태종이 그를 궁궐에 불러들인 것이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주·항주지역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흔히 장영실 하면 세종 임금이 떠오르지만, 장영실의 재능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임금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