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장영실은 <대왕세종>의 장영실과 다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장영실, 어느 왕이 발굴했을까?

등록 2008.03.28 15:22수정 2008.03.2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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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실. 드라마 <대왕세종>.
장영실. 드라마 <대왕세종>. KBS

<대왕세종>의 황당한 설정 중 하나로 천재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행적을 들 수 있다. 드라마 속 장영실은 상전인 한영로의 딸 다연으로부터 위험한 사랑을 받는다. 또 그는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해서 무기 제조를 담당한다. 그 무기가 충녕대군까지 겨누다니!

드라마 속 장영실의 행적도 위험천만하지만, <대왕세종> 작가의 상상력 또한 상당히 위험천만한 편이다. 아무리 관련 기록이 적다고 해도 최소한의 개연성을 바탕으로 해야 할 텐데, <대왕세종>에서는 그런 개연성이 이미 오래 전에 실종된 듯하다.

비록 동래현 소속의 관노였다고 해도 그 정도의 천재였다면, 상전의 딸이 정말로 위험한 사랑을 선택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관노와 결혼함으로써 생기는 불이익보다는 천재와 결혼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너무 계산적인 발상일까? 아무튼 다연과 영실의 사랑은 얼마든지 개연성 있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왕세종>, 역사 속 장영실 제대로 표현 못해

하지만, <대왕세종>은 그것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의 장영실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관련 기록이 너무 적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적은 돈을 밑천으로 큰돈을 만드는 것이 유능한 상인이듯이, 한정된 자료 속에서도 중요한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이 유능한 역사학자나 역사작가다.

냉혹하게 말하면, <대왕세종>은 장영실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영실에 관한 주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몇몇 군데에서 중요한 왜곡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알고 행한 왜곡이든, 모르고 행한 왜곡이든 간에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장영실과 관련하여 <대왕세종>이 범하고 있는 왜곡 중에서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장영실의 외면세계에 관한 것이다.


첫째,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왜곡

관련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에 장영실의 내면세계는 추론의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추론에도 일정한 법칙은 있어야 한다. 추론의 과정과 결론이 자연과 인간의 보편타당한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만약 보편적 법칙이 아닌 특수한 법칙을 취하고자 한다면, 왜 그런 예외를 선택했는지 그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묘사는 바로 이 점에서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장영실 등이 만든 자격루(물시계)를 개량한 중종 때의 보루각 자격루. 서울 덕수궁 소재.
장영실 등이 만든 자격루(물시계)를 개량한 중종 때의 보루각 자격루. 서울 덕수궁 소재. 김종성

드라마 속의 장영실은 이미 반정부 혹은 반체제에 가담해 버렸다. 게다가 그가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제공한 무기가 충녕대군을 겨누기까지 했다.

"노비 출신이니까 사회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천재적인 노비였으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조선사회의 전복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시 조선사회가 건국 초기였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국 초기는 일반 평민들에게는 '기회의 시대'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나 치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 재벌 혹은 대기업가로 성장한 사례가 많이 나타난 시기가 대한민국 건국 30년 이내였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이 채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농민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신분이 세습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난다.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도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시기였다.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때였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미천한 관노들이 능력을 바탕으로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사례가 많았다. 평양 관노 김인(金忍)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굳이 반정부 혹은 반체제를 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있었다.

장영실이 반정부 세력에 가담? 상식밖 설정

건국 초기에 반정부나 반체제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전 시대의 특권층이거나 혹은 지식인 계층이다. 천민이나 평민에게는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건국 초기의 조선체제가 막 무너진 고려체제보다 더 진보적인 점을 고려할 때에, 조선체제에 대한 평민 혹은 천민들의 인식은 저항심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장영실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인재에 목마른 신왕조는 장영실의 출신성분보다는 그의 능력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조건 속에서 장영실이 체제에 친화하지 않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고를 했을 것이라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그 근거가 될 최소한의 사례라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영실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혈통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중국 강남 출신의 귀화인과 한민족 출신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귀화인들은 현지 사회의 주류문화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기 마련이다. 귀화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은 주로 현지 사회의 제도권이다. 귀화 1세대가 현지 사회의 반체제를 동경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다.

장영실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영실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면, 그가 조선 체제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하는 내면세계를 지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그가 살았던 시기가 건국 초기의 혼란한 기회의 시대였고 또 그가 현지문화를 지향하는 귀화인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 장영실이 고려황실 잔존세력 같은 저항조직에 가담했다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뭔가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둘째, 장영실의 외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왜곡

<대왕세종>에서는 양녕의 폐위가 임박하고 태종의 양위가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하는 장영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영실은 태종때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평양 관노 김인과 마찬가지로 장영실 역시 태종이 스카우트한 과학기술자였다.

장영실은 태종이 보호하던 사람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자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출중했기 때문에 태종이 그를 특별히 보호했다고 한다.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태종이 그를 궁궐에 불러들인 것이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주·항주지역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

흔히 장영실 하면 세종 임금이 떠오르지만, 장영실의 재능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임금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장영실을 발탁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대왕세종>.
장영실을 발탁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대왕세종>. KBS

<대왕세종>이 장영실과 조선왕실의 만남을 계속 늦추는 것은 다분히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를 과대평가한 데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영실과 이방원의 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면, 태종의 양위가 임박한 상황 하에서도 장영실이 '밖'으로 나도는 상황을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 픽션 <대왕세종>은 조선 초기의 천재적 과학기술자 장영실과 관련하여 몇 가지의 왜곡을 범하고 있다. 그가 반정부 혹은 반체제 성향을 지녔을 것이라는 설정이 그러하고, 태종의 양위가 임박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태종을 만나지 못한 채 저항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귀화인 2세로서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면서 현지 사회인 조선의 주류문화를 동경하는 장영실. 그런 장영실을 전격 발탁한 태종 이방원.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국왕이 관노를 특별히 발탁하는 그런 예외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영실의 이미지와 그가 처한 상황은 그러했다고 보아야 한다.
#대왕세종 #대왕 세종 #장영실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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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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