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백작>으로 시 세계에 눈뜨다

[서평]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교육)

등록 2008.03.28 14:21수정 2008.03.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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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백작>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시간 맞춰 다 보았다. 김수영, 박인환, 이봉구, 이중섭 등 알만한 이름들이 다 나왔다. ⓒ EBS


도봉산에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들머리는 1·7호선 도봉산역이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과 등산용품 가게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면 이윽고 약수터가 나오고, 다시 50여 미터쯤 위에 '도봉서원터'라는 자리가 나온다.

이 서원터에는 우아한 시비가 하나 서 있는데 바로 김수영 시비다. 그동안 수십 수백 번도 넘게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는데, 정녕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지 근래 어느 책에서 읽은 뒤 일부러 찾아가서야 그게 김수영 시인의 '풀'이 새겨진 시비인 줄 알게 됐다.


"학창 시절에 랭보니 바이런, 김수영이니 하는 시인들에게 혹해서 시 한 수 외우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며, 연애편지에 그들의 시 한 수 베껴 쓰지 않은 자 뉘 있으랴"하고 누군가는 물었다.

내가 꼭 그런 사람이다. 애당초 시니, 시인이니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시가 좋아진 것은 2~3년 쯤 전에 봤던 EBS 드라마 <명동백작> 때문이었다. <명동백작>은 1950~60년대 문학의 거리, 예술의 거리 명동을 배경으로 시인, 소설가, 화가, 배우 등 예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과 정치깡패 이화룡까지 등장시켜 극적인 재미를 더했다. 이 드라마 덕분에 '시 까막눈'이나 다름없던 내가 그나마 시 한 수 읊조릴 줄 아는 인간이 된 것이다.

나를 '시'로 인도한 드라마 <명동백작>

이 드라마에는 아주 인상적인 명장면들이 몇 있었다. 명동의 어느 술집에 모여 앉은 사람들. 그 중 박인환이 갑자기 시를 쓰자 친구 이진섭은 시에 맞춰 작곡을 하고, 가수 나애심은 그 노래를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하고 멋들어지게 불렀다.

수주 변영로와 공초 오상순은 한강에 배를 띄워놓고 앉아 달을 바라보면서 시를 주고 받는 그야말로 '음풍농월'을 즐겼다. 김관식 시인으로 분한 탤런트 안정훈은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 중에 상당히 긴 부분을 외워 읊었다. 그 후 나도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몇 번 외어보려 했지만 워낙 장문이라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시는 읽자마자 번쩍 환하게 깨달아지고, 가슴으로 뭉클 느껴지는 것이지 반드시 시인의 삶과 결부시켜 그 시의 탄생 과정과 역사적 의의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와 같은 방식, 즉 시인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여 어떠한 정신적, 물리적 배경에서 써진 것인지 이해한다면 시에서 더욱더 많은 감상과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사를 모르고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을까? 김지하의 시에서 독재정권과 안기부를 떼어낼 수 있을까? 전기고문, 물고문의 후유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천상병 시인의 시를 논할 수 있을까?


시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른 종족들이다.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난 상처는 금방 아물지만 시인들에게 난 상처는 훨씬 오래 간다. '남의 상처도 내 것처럼 아파할' 정도라는 그들의 여린 감수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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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우리교육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으로 여겨질 사건이 그들에게는 눈물이 날 만큼의 행복이 되는 것도 바로 감수성의 차이 때문인 것이다. 그토록 예민하고 여린 사람들에게 닥친 전쟁과 가난, 고문과 수감생활의 상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이 사회와 세상이 온갖 상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절규가 바로 시인데, 시인을 빼고 시만을 읽는다는 게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EBS 드라마 <명동백작>을 통해 서로 다른 시세계 때문에 갈등했던 김수영과 박인환을 알게 됐고, 동서지간이었던 서정주와 김관식을 알게 되었고, 일생 담배를 물고 살았다는 공초 오상순과 술로 당할 자가 없다는 수주 변영로의 삶과 예술을 알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역시 그러한 역할, 즉 시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적당한 책이다. 시인의 삶과 행적, 생전에 살았던 마을과 시비, 그가 남긴 작품의 문학적 가치 등에 대해 미리 공부가 되어 있다면 시도 또한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매주 지나다니던 그 길에서 이제서야 김수영 시비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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