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그릴 테니, 자네는 시를 써 넣게나"

[서평] 유홍준의 <화인열전>

등록 2008.03.30 10:56수정 2008.03.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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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자칫 딱딱하기 쉬운 미술사 분야지만 유홍준 선생은 특유의 유려한 글솜씨로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 역사비평사

▲ 화인열전 자칫 딱딱하기 쉬운 미술사 분야지만 유홍준 선생은 특유의 유려한 글솜씨로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 역사비평사
강남 다음가는 부자 동네가 되어 버린 양천구, 지금이야 서울특별시의 경계 안에 있지만 옛날 조선시대에는 독립된 하나의 행정구역 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당시엔 사대문을 기준으로 안팎을 구별했고, 동대문 밖 제기동이나 청량리만 해도 벌써 양주에 속하는 땅이었을 진대 하물며 남서쪽 강 건너에 있는 고을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별도의 행정구역 이었던 양천현에도 수많은 현령들이 왔다 갔겠지만 그중 눈에 띄는 현령이 있었으니 바로 겸재 정선이다. 겸재 선생이 지방고을 수령이었다? 그림에 관한 명성이 워낙 대단해서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지만 그는 어엿한 양반 사대부 출신 공무원 이었던 것이다.

 

당시 한강변을 끼고 있었던 양천현은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순후 한데다 자연경관마저 아름다워 아마 현령 노릇도 느긋하니 제법 할만 했을 것이다. 현령으로 근무하는 동안 겸재 선생은 <경교명승첩>이라는 화첩을 만들었는데, 경기도 양평 근처의 남한강변을 시작으로 양수리, 광나루, 송파나루, 압구정, 행주대교 근방에 이르는 한강변의 옛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놓았다고 한다.

 

겸재의 뛰어난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이 화첩을 만들게 된 사연도 참 아름답다. 당대의 시인이었던 사천 이병연에게 "나는 한강변의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 보낼 테니, 그대는 그 그림에 시를 적어 돌려 보내주게" 라고 했다는 것이다. 풍류의 대가들이라 사귐의 방법 또한 풍류스럽다고나 할까.

 

겸재가 그림으로 남겨놓은 양천현의 관아는 지금의 양화대교 남단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데, 이미 도심 고층 건물이 가득 들어서 버려 이를 다시 복원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옛 관아의 모습을 복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선구자이며 완성자인 겸재 선생이 양천현령으로 봉직한 사실, 양화나루를 기점으로 한강변 명승지를 그려 화첩을 남긴 사실 등은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할것이니, 내가 만약 양천구청장이라면 '겸재 정선 컨텐츠' 개발을 한번 모색해 보겠다. 춘향이로 인해 남원은 정절의 고장이 되었고, 경기도 안산시는 단원 김홍도를 찾아냈다. 나아가 소설속 허구인물인 홍길동을 관광 컨텐츠로 개발한 전남 장성군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저자 유홍준 교수는 중세 이태리 사람인 조르지오 바사리가 쓴 <미술가 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이 책이 그를 미술사가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일면 생각해 보면 이태리에서는 이미 중세에 화인열전과 같은 책이 나왔다는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21세기에 와서야 <미술가 열전>과 같은 책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고흐나 피카소는 많이 알아도 오히려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와 같은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무성의에 대한 반성, 조상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 책 저술을 시작해, 지난 10여년의 노력 끝에 화인 8명의 열전을 완성했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나도 역시 우리 조상들의 예술에 대한 무지를 절감해야 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가서 샤갈이니, 피카소니 하는 전시회는 본적이 있지만 우리 옛 그림은 학창시절 교과서 이후로 본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유홍준 교수의 글은 언제나 힘과 박진감이 넘친다. 한국 미술이라고 하는 어려운 분야, 그중에서도 미술사라는 낯선 학문에 관한 책이면서도 술술 읽힌다. 장황하게 미술사조니 기법이니 하는 이론을 가르치려는 책도 아니고, 반대로 그림만 나열해 놓고 독자들에게 알아서 감상하라는 불친절한 책도 아니다. 화가의 생애, 작품의 유래와 에피소드, 나아가 비평가의 시각으로 보는 예술적 평가까지도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비전문가 일반인들에게도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과연 유홍준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모두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각각의 분야에서 이와 같은 뛰어난 저작물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면 위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인문학의 르네상스도 가능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옮깁니다.

2008.03.30 10:5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옮깁니다.

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역사비평사, 2001


#책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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