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 머슴정신!

[서평] <선비답게 산다는 것>

등록 2008.03.31 18:46수정 2008.03.3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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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진 게 이거밖에 없으니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어려우시겠지만 도와주십시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렇게 상대방과 마주 서서 뭔가 부탁을 하는 데는 영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가끔 천성적으로 아무하고나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옆에서 지켜보기에 다소 무리한 요구 같은데도 갖은 넉살과 아양으로 뜻을 이뤄내는 친구들을 보면 아주 부럽다.
 
재래시장에 가서도 내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자세를 취하는 동안 아내는 한 푼이라도 더 깎기 위해 수더분한 깍쟁이 아줌마 흉내를 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을 뿐 흥정에 도움될 방법을 모르겠다. 물건값 흥정도 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를 끔찍이 싫어하고, 그저 저만 잘난 줄 아는 앞뒤 꽉 막힌 위인을 보면서 내 아내는 이렇게 탄식한다. "으이그, 저놈의 선비정신…."

 

아내가 말한 이 '선비정신'은 애교가 조금 섞인 비아냥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혼자서 고고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사농공상은커녕 디지털 기술 만능주의 시대요, 모든 경제지표가 재테크나 아파트 시세로 귀결되는 세상에 선비정신은 무슨 얼어 죽을…. 그런 뜬구름 잡는 허울은 그야말로 가난과 남루함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의미의 비아냥인 것이다.

 

물론 남자가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따라나섰다는 것만도 선비에게는 상당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잘 아는 아내는 그나마도 고맙게 여기는지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선비정신? 우아하고 멋진 선비의 얘기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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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표지 ⓒ 푸른역사

▲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표지 ⓒ 푸른역사

하지만 '선비정신'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하다. 이 책의 제목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서 나는 언뜻 대쪽같은 신념이니, 강직한 성품이니, 또는 청백리였다느니 같은 상투적인 찬사와 미사여구들을 떠올렸다.

 

위인전에서 많이 봐왔던 옛 양반들의 우아한 정신세계, 아니면 한가롭게 풍류나 즐기며 살았다는 무욕의 정신을 찬미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그러나 차근차근 읽다 보니 나의 성급한 지레짐작이 반만 맞고 반은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아하고 멋진 선비의 얘기도 있지만 개중에는 별로 바람직할 것도 없이 '참 특이한 사람도 다 있었구나' 싶은 선비들의 얘기도 많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가 흔히 봐왔던 중후하고 우아한 선비의 이미지에서 '어깨의 힘을 반쯤 뺀'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선비들의 모습, 예를 들자면 스스로 묘지명을 써놓고 죽은 선비, 십수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 사대부, 미술품 수집에 가산을 탕진해버린 수집광, 사기의 <백이전>을 너무 좋아해서 일억 번 넘게 읽었다는 특이한 양반 등의 얘기는 요즘 TV 프로그램 제목에 빗대 말하자면 조선시대판 <앗!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기인을 찾아서> 쯤에 나옴직한 꺼리들이다.

 

요새 곳곳에 개성이 넘치는 기인들이 많은 것처럼 그 옛날 우리 조상들 중에도 특이하고 해괴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은 참 이채롭다.

 

하기야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것이 없는 법이다. 근엄하고 장중한 왕조의 역사를 밝힌 책들은 물론이려니와 당시의 사람들 개인 개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책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수백 수천 년 전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으로 살았다는 인식, 어깨에 힘을 빼고 그저 그렇게 살았다는 인식이 바로 옛 역사를 바로 보는 출발점인 까닭이다.

 

역사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화석화된 얘기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일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건들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라는 분야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밑바탕일 것이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 보러 다니는 데 우아하고 고고한 선비정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하겠다는 '머슴정신'이면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푸른역사, 299쪽, 1만2000원

2008.03.31 18:4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푸른역사, 299쪽, 1만2000원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푸른역사, 2007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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