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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오뉴월, 보릿고개가 다가오는 이맘때가 되면 눈에 선명하게 밟히는 음식이 있다. 나그네의 고향 경상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맛깔스런 음식. 한술 떠서 입에 넣으면 까끌까끌하게 구르면서도 쫀득하게 씹히는 그 맛. 끝없이 혀끝을 마구 희롱하는 그 쫄깃쫄깃한 면발과 달착지근한 죽. 그게 바로 기장밥과 팥칼국수다.
사실, 나그네가 기장과 팥, 칼국수가 어우러진 절묘한 맛에 폭 빠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이맘때였던가. 가까운 벗들과 함께 전남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에 여행을 갔다가 점심나절 잠시 들른 고즈넉한 초가집. 그 집에서 기장밥과 팥칼국수를 처음 먹어보았다.
나그네가 어릴 때 기장은 보름날 어머니께서 오곡밥을 지을 때 넣었고, 팥은 동짓날 새알심과 함께 팥죽을 쑤어 먹거나 여름철 팥빙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러니까 나그네의 고향 창원에서는 기장만으로 밥을 짓지 않았고, 전라도 지역에서 여름철 흔히 즐기는 팥칼국수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때 그 초가집에서 70대 중반 가까이 되어 보이던 그 할머니께서 주섬주섬 차려주시던 그 기장밥과 팥칼국수의 맛이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특히 보리가 연초록 대를 쑥쑥 밀어 올리는 초여름이 다가올 즈음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 초가집으로 달려가 까끌한 기장밥과 담백한 팥칼국수를 게걸스럽게 먹고 싶었다.
공자가 손으로 집어먹은 기장밥, 이뇨작용 뛰어난 팥
벼, 보리, 조, 콩과 더불어 오곡의 하나로 자리 잡은 기장. 지금으로부터 2500년 앞 춘추시대에 살았던 공자가 손으로 집어먹었다는 기장밥. 단백질, 지질, 비타민A가 듬뿍 들어 있는 기장은 겉모양은 조와 비슷하지만 조보다 알이 더 굵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앞 중국 의학자 도홍경의 <명의별록>에는 "황기장은 속을 고르게 하고 설사를 그치게 하며, 청기장은 소갈(당뇨병)을 다스리고 속을 보한다. 장수하려면 기장으로 죽을 쑤어 먹는다"라고 적어 놓았다. 명나라 때 본초학자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도 "황기장은 곽란과 설사를 다스리고 번열을 없앤다"라며 기장이 약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 콩보다 적은 콩이라 하여 소두(小豆) 혹은 적소두(赤小豆)라고도 불리는 팥은 독특한 붉은 빛 때문에 예로부터 집안에 들어온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는 신묘한 먹을거리였다. 비타민 B1이 듬뿍 들어있는 팥은 각기병, 피로회복, 식욕부진, 수면 장애, 기억력 감퇴, 신경쇠약 등에 아주 좋다.
특히 소변이 잘 나오지 않거나 방광염으로 인한 통증, 혈뇨가 있을 때 팥에 파를 넣고 달인 물을 공복에 마시면 좋다. 이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몸이 부을 때 팥 달인 물을 마시면 붓기가 사라진다. 팥 달인 물을 마시기 힘들 때에는 꿀을 조금 섞어 수시로 마시면 효과가 있다.
그 집에 가면 초여름 별미 기장밥과 팥칼국수가 있다
지난해 이맘때 여수에서 살고 있는 조찬현(50) 시인과 함께 찾았던, 기장밥과 팥칼국수를 파는 한 향토음식전문점. 순천시 상사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이 식당은 나그네가 4~5년 앞에 찾았던 그 초가집, 노란 기장밥과 붉으죽죽한 팥칼국수를 차려주시던 그 할머니가 계시던 그 집은 아니다.
순천 시내에서 상사호를 가기 위해 비좁은 오솔길을 따라 가다가 정말 우연하게 들르게 된 집이다. 이 집 들머리에 '팥칼국수+기장밥'이란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나그네를 마구 끌어들인 것이다. 그 뒤부터 나그네는 그 집에 서너 번 더 들락거렸다. 한 번은 보리밥을 먹었고, 또 한 번은 막걸리와 파전을 먹었다.
그때부터 순천 하면 나그네에게 기장밥과 팥칼국수를 처음 맛보인 그 할머니 집보다 그 집 기장밥과 팥칼국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급한 볼일이 있어 순천에 가게 되면 꼭 그 집에 들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그네가 4~5년 앞에 갔었던 그 할머니 집을 기억이 가물거려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식탁이 놓여 있는 안방을 환하게 밝혀주는 대형 유리창이다. 이 유리창 밖에 펼쳐진 연초록빛 다랑이논과 졸졸졸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햇살을 따라 순식간에 안방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벽면에 붙은 초가집 그림과 청초롱도 이 집 분위기를 한껏 돋보이게 만든다.
소화 잘되고 설사 멎게 하는 기장밥
"기장은 2~3시간 물에 불려 깨끗이 씻은 뒤 찜솥에 쪄야 하지요. 그리고 찜솥에 찐 기장은 반나절 안에 다 먹어치워야 합니다. 반나절이 지나게 되면 기장의 샛노란 빛깔이 희끄무레하게 변하거든요. 그 때문에 저희 집은 손님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물에 불려놓은 기장밥을 짓지요."
이 집 주인 박여덕(42)씨는 "기장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기를 돕고 비타민A와 B가 많이 함유되어 있다"면서 "기장에는 특히 단백질과 지질이 많아 소화가 아주 잘되고 설사를 그치게 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팥은 하루 사용할 양만 삶은 뒤 재료가 떨어지면 더 이상 팔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기장밥과 팥칼국수를 시키자 곧이어 맛깔스럽게 무친 열무김치와 묵은지, 곰삭은 파김치, 노릇노릇하게 부쳐낸 부추전, 멸치젓갈, 잡채, 4색 나물이 식탁 위에 올려진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기본 밑반찬이 이렇게 푸짐한 데도 저만치 초가집 그림이 예쁘게 걸려 있는 한쪽 벽면에 셀프코너가 있다는 것이다.
이 셀프코너에는 주인이 직접 가꾸는 텃밭에서 자라는 상추와 치커리, 적치커리, 풋고추 등 채소류가 푸짐하게 쌓여 있다. 어디 그뿐이랴. 비곗살과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진 돼지고기 주물럭도 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갖다 먹으라는 투다.
기장밥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어떡해?
나그네가 셀프코너에서 여러 가지 채소와 돼지고기 주물럭을 주섬주섬 챙겨 식탁 위에 올리고 있을 때 노란 기장밥 한 그릇과 커다란 사기그릇에 담긴 붉으죽죽한 팥칼국수가 식탁 위에 놓인다. 동글동글한 알갱이가 귀여운 기장밥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자 꺼칠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쫀득거리는 감칠맛만 남아 혀끝을 툭툭 친다.
"공자는 기장밥을 손으로 집어먹었다던데, 기장밥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어떡해?"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맛만 좋당게. 자네는 공자처럼 손으로 집어먹어."
"히야! 이거 반찬 없이 먹어도 되겠다."
"기장밥 위에 묵은지 하나 올려 먹어보랑게. 맛이 죽인당게. 보릿고개철 보약이 따로 없당게."
붉으죽죽한 팥칼국수의 담백한 맛도 끝내준다. 특히 팥죽 속에 든 칼국수가 입천장을 치면서 쫄깃쫄깃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달착지근한 팥칼국수 입에 넣고 곰삭은 파김치 하나 입에 물면 세상사 시름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것만 같다. 칼국수를 다 건져 먹고 난 뒤 남은 걸쭉한 팥죽을 후루룩 마시고 나면 혁띠가 저절로 풀어진다.
이 집 차림표에 있는 젓갈정식(7천원)과 보리밥(5천원), 동동주(5천원), 파전(5천원) 등도 입맛을 당긴다. 그중 보리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어 내놓는 이 집 보리밥 맛이 으뜸이다. 곱슬하게 지은 보리밥 위에 여러 가지 나물을 올리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얹어 쓰윽쓱 비벼먹는 기막힌 맛! 어머니의 손맛이란 게 바로 이런 맛이 아니겠는가.
기장밥과 팥칼국수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장수음식인 기장밥과 팥칼국수는 초여름에 먹어야 가장 맛이 나는 음식이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입맛이 없어지거나 까닭 없이 피로가 몰려올 때면 순천으로 가서 향토음식인 기장밥과 팥칼국수를 먹어보자.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리라. 동동주 한 잔 곁들이면 세상 시름까지 싸악 날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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