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의 '용한 의사'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

정진화 선생님의 청와대 앞 단식농성을 지지하며

등록 2008.04.27 18:52수정 2008.04.27 19:45
0
원고료로 응원
a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전교조 정진화 위원장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전교조 정진화 위원장 ⓒ 송주민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전교조 정진화 위원장 ⓒ 송주민

어제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토요휴무일이라 동료 교사들과 함께 산을 다녀온 뒤였습니다. 전날 학교 소풍에 이어 이틀째 연이은 산행에 몸이 많이 지쳐 있었지만 서둘러 전자우편을 열어본 것은 '청와대 앞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며'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정진화 위원장께서 '4·15 학교 학원화 정책' 전면 백지화를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한 사실은 이미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절박하고 다급한 마음에 쉽지 않은 결단을 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말릴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었습니다.

 

양성평등 정신에 어긋나는 잘못된 생각인줄 알면서도 정 위원장께서 여성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여, 하루 한 끼라도 함께 단식하며 마음으로나마 힘을 보태줄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뜨거운 순간도 잠시뿐, 산행을 마친 뒤 맛있고 푸짐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아무런 짬도 없다가 편지 제목을 보고서야 번쩍 정신이 든 것이지요.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절규하며 죽어간 어린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참회의 마음으로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교조는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경쟁에 내몰리는 학생들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과 제도를 만들어 주고, 꿈과 건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학교 교육을 2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 앞에서 또다시 참담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편지를 읽다가 '학교 교육을 2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이라는 대목에서 잠깐 눈길이 멎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교 교육은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물음이 솟구쳤던 까닭이지요. 그렇게 잠시 물음을 던져놓고 가만 생각해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에서의 긍정적인 변화가 새삼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입시교육을 심화시킨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 일선 고등학교는 사정은 전혀 다릅니다.  


'교육=입시교육'이라는 등식이 이미 세워진 사람들에게 입시교육의 병폐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남감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유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느냐는 식이지요. 문제는 그런 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줄 책임이 있는 정부가 '실용주의'와 '자율'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교육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서 마련해놓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제거하려는 데 있습니다.

 

최소한의 안정장치마저 제거하려는 '실용주의' 정부

 

'사람은 돼먹지 않아도 일류대학만 가면 된다'라는 식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동안 국민 대다수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일천하여 교육정상화에 대한 염원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란 게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우선 눈에 보이는 결과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용한 의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도 나이 지극하신 분들은 어디어디에 가면 참 용한 의사가 있다는 말들을 곧잘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용한 의사'라는 말은 크게 신뢰하지 않는 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환자의 병세가 놀랍도록 빨리 호전될 경우 '용한 의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곤 합니다. 하긴 의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환자의 병세를 호전시킨 '속도'가 훌륭한 의사를 가리는 유일한 판단 기준일 수밖에 없긴 합니다.


하지만 '용한 의사'의 비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가 오히려 환자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환자가 어린이인 경우, 항생제 남용을 철저히 법으로 규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라지요. 필요 이상의 용량을 투여하면 병세는 빨리 회복될지 모르지만 환자의 몸에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겨 나중에는 치료가 더디거나 불가능해지는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입시교육에 대한 우려감을 갖지 않는 것도 그 심각한 부작용이 당장은 감지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몸에 과량으로 투여된 항생제 남용이 필연적으로 사람의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듯이, 오로지 점수 따기 경쟁만으로 소중한 학창을 허비하거나 탕진하고 있는 아이들의 삶이 장차 어떠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교육선진국에서도 국가의 백년지대계인 교육을 지역교육청이나 학교 단위에 자율적으로 맡겨 운영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더욱이 교사자격증도 없는 영리단체인 학원 강사를 공교육 현장에 투입하는 사례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 이유는 물론 아이들을 '용한 의사'의 항생제 남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뜻에서겠지요.    


이번 정부의 이른바 '학원 자율화조치'로 공교육을 건전하게 지탱할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제거되면 아이들은 점수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입시교육으로부터 안전지대였던 초등학교마저도 학생들의 점수가 공개되면 학부모들은 너나없이 '용한 의사'들을 찾아가 "사람은 돼먹지 않아도 좋으니 일류대학만 가게 해 달라"고 생떼를 부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각할수록 참 답답하고 슬픈 일입니다.   


그런 까닭이겠지요. 평소 아이들에게나 동료교사들에게 다정하고 곱기만 하던 정진화 선생님의 일갈이 이렇게 무섭도록 아프게 들리는 것은.       

 

'아침도 못 먹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0교시를 부활시키고, 어린 나이에 열등감을 체화시킬 우열반을 편성시키고, 하루 9시간에서 10시간의 수업도 모자라 심야 보충수업까지 허용하는 정책이 어찌 학교자율화란 말입니까? 촌지안주고안받기 규제 철폐, 어린이신문 강제구독 금지 철폐, 사설모의고사 금지 철폐가 어찌 자율적 학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학생들을 완전한 입시의 노예로 만들고, 학교를 비리의 온상으로 되돌리려는 반역사적, 반교육적 조치들 앞에 우리는 다시 저항의 촛불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절박하고도 참담한 심정으로 40만 교원, 국민들께 호소 드리며 오늘부터 청와대 앞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힘을 모아주십시오.'   

 

존경하는 정진화 선생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먼 미래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아이들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소중한 학창에서의 행복을 위해, 저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교사로서,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미력이나마 힘을 모으겠습니다. 부디 강건하시길 빕니다.

2008.04.27 18:52ⓒ 2008 OhmyNews
#정진화 선생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혼해주면 재산 포기하겠다던 남편, 이 말에 돌변했다 이혼해주면 재산 포기하겠다던 남편, 이 말에 돌변했다
  2. 2 "쿠팡 심야 일용직 같이 하자했는데... 3일 만에 남편 잃었습니다" "쿠팡 심야 일용직 같이 하자했는데... 3일 만에 남편 잃었습니다"
  3. 3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4. 4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5. 5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