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 시대에 대한 밀도 있는 서술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등록 2008.04.28 13:55수정 2008.04.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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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군주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행복이라 자신한다. 강한 군주라서가 아니다. 정치를 잘해서만도 아니다. 많은 치적을 남겨서도 아니다. 진정 백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놓은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에서 요순은 성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 시대에서 이상을 이룬 군주들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달랐다. 그는 현실 속에서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을 이뤄냈다.


600년 전 이 땅에는 여자 종과 그의 남편이 출산휴가를 가고, 죄수가 머무는 옥사를 관리하면서 죄수가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제도화시키는,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다. 바로 세종대왕과 그를 받든 충직한 신하들이 만들어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만세불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있다는 오늘날에도 남편들의 출산휴가는 찾아보기 힘들고 죄수가 인권을 보장받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아쉽다면 그것이 일제에 의해 단절되고 왜곡되었으며, 해방 후 우리들에 의해 그 귀중한 유산이 남김없이 버려졌다는 사실이다.

왜 지금 세종대왕인가? 사회는 민주화되었고,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함이 없는 지금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속은 곪아 썩어들어가고 있다. 당장의 우리 정치를 보자. 한 나라의 저력인 역사와 문화를 갉아먹는 좀 같은 존재들인 탐관오리들이 날고 기고 있다. 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아래인 우리도 정신이 썩어 있긴 마찬가지다. 그런 좀 같은 존재들을 뽑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 그들이 사건을 터뜨리면 그제서야 후회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나의 탓이 아닌 남 탓으로 돌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우리의 모습이다.

나 자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를 돌아보면 내 얼굴에 침 뱉는 식으로 끝모를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태평의 시대, 성군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세종대왕의 치세나 정조대왕의 치세를 대하면 더욱 그러하다.


어진 지도자 밑에 어진 관리가 있게 마련이며 또한 백성들도 어질게 된다. 마찬가지로, 백성이 어질어야 어진 관리가 있으며 어진 지도자가 있는 것이다. 정치가 민주화되고 먹고 살기가 이전보다 많이 좋아진 지금,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문화와 도덕이다. 우리가 세종대왕의 시대를 다시 눈여겨봐야 할 이유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 대중화의 기수’이다. 이 점은 나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그의 책에 대해 많은 혹평을 했지만, 세종대왕에 쓴 그의 책만은 예외로 둔 바가 있다.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을 증보한 것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는<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이다.


내가 이 책을 특별히 눈여겨봤던 것은 세종대왕과 그를 따른 수많은 충직한 신하들을 균형있게 다뤘다는 사실과 그들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는 사실때문이다. 역사는 사람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역사를 만들어간다. 한 사람만의 힘으로 역사가 바뀐다면 그 역사는 지극히 나약한 것이다.

세종대왕에 대해 다룬 수많은 책들이 범했던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최근 역사서들 가운데는 세종대왕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보인 바 있는데, 그 또한 심한 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 주변 인물들을 꿰는 역할을 하는 세종대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보배로 엮어지지 못한 서 말의 구슬 같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종실록>을 요략한 부분과 세종대왕, 친인척, 인재들, 그의 업적을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균형을 지닌 서술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가장 중요한 사료인 <세종실록>을 기본으로 하여 엄정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점이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요즘 세종 시대를 다루면서 야사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면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한글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을 이야기하면서이다. 한글의 글자가 고전(옛 글자)을 모방했다는 점에서 <환단고기>에 실린 가림토 문자를 언급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환단고기>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거짓 서적이다. 따라서 가림토 문자를 모방했다는 것도 황당하며 믿을 수 없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한글의 창제 동기라든지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이 엄연히 전해오며, 그 글자의 만들어진 원리를 살펴볼 때 가림토 문자와의 연관성은 전혀 없음이다.

현재 <환단고기>는 20세기 초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여기에 실린 가림토 문자라는 것이 일본의 신사에 새겨져 있는, 또는 <신자일문전>과 같은 조작된 서적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거짓 서적에 실린 문자를 주장하는 것도 터무니없거니와 자칫하면 일본의 문자를 모방했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일본의 황당한 논리에 설득력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으로도 연결된다. 이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이런 황당하고 무서운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조그만 지적을 하나 더 한다면 <세종실록>을 번역한 곳에 관한 것이다. 일러두기에 보면 민족문화추진위원회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윤문 과정에서의 오류로 보인다. <세종실록>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국역되었으며, 실록 가운데 최초로 국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 두 기관에서 나누어서 번역했는데, <태조실록>부터 <성종실록>, <경종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연산군일기>부터 <현종실록>까지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했다. 단, <정조실록>은 두 기관이 공동으로 국역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것이 이 책이다. 세종대왕과 그의 치적, 주변 인물들을 그 시대의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적절하게 서술하면서 거시와 미시의 균형을 가진, 밀도 있는 서술은 세종의 시대에 관한 적지 않은 정보와 감각을 얻기에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제 블로그, 북카페 등에 올린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제 블로그, 북카페 등에 올린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박영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8


#세종대왕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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