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붕' 네팔에 민주화의 봄은 오는가

[세상 톺아보기] 프라찬다식 '실용외교' 꽃 피나

등록 2008.05.08 09:20수정 2008.05.0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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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의 한 티베트 공예품 상점.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의 한 티베트 공예품 상점. ⓒ 김당


한 달간의 안식월 휴가를 맞이해 오랫동안 계획해온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코스는 8박9일간의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레킹. 흔히 ABC(Annapurna Base Camp) 혹은 APBC라고 줄여 부르는 트레킹 코스다.

5일 동안 걸으면서 많은 네팔 주민들을 만났다. 주로 가이드와 포터, '롯지'라고 부르는 산장 겸 식당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네팔 정세와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주의공산당' 네팔 총선거에서 제1당... 제2, 3당과 연정 표방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갓 넘긴 한국의 총선거는 4월 9일 치러졌다. 네팔의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은 그보다 하루 뒤인 10일 치러졌다. 다른 점은 한국에서는 투표 당일에 곧바로 총선 결과를 알 수 있었는데, 네팔은 투표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결과를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지난 4월 24일 아침 서울을 출발할 때만 해도 일부 언론은 마오주의공산당(CPN-M)이 지역구 의석(240석)의 절반인 120석을 확보하고, 비례대표 335석이 걸린 정당 득표율에서도 선두를 달림에 따라 과반의석 가능성을 점쳤다.

a  한 네팔 주민이 총선거에 출마한 후보들과 마오주의공산당 포스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한 네팔 주민이 총선거에 출마한 후보들과 마오주의공산당 포스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 김당


그러나 막상 현지에 가 보니 과반에는 크게 미달했다. 마오주의공산당은 지역구 의석의 절반(120석)을 확보했으나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는 29.3%를 기록해 97석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그동안 과도정부를 주도해온 네팔국민회의당(NC)은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산해 107석,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연대 네팔공산당(UML)은 102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마오주의공산당은 총 601석의 제헌의회 의석 중 3분의 1이 넘는 217석을 차지해 네팔이 239년의 왕정을 마감하고 공화제로 전환하는 첫 민주정부에서 제1당으로서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제헌의회 의석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다. 현재 네팔에는 74개 정당이 난립해 있다. 그 가운데 마오주의공산당과 이번 선거에서 제2당으로 전락한 국민회의당 그리고 제3당인 네팔공산당(UML)이 3대 정당으로 꼽힌다.

마오주의공산당은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 공동 임시정부에서 연정 경험이 있는 국민회의당과 '색깔'이 비슷한 네팔공산당과 모두 연대해 연립정부를 구성키로 하고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고 있다.


첫 시험대는 갸넨드라 국왕 처리 문제... 인도로 망명할 듯

a  한 민가에 붙어 있는 네팔 왕실 사진.

한 민가에 붙어 있는 네팔 왕실 사진. ⓒ 김당

일단 정국 운영의 첫 시험대는 갸넨드라(Gyanendra) 현 국왕에 대한 처리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10년 간의 무장봉기를 통해 왕정 철폐를 이끌어낸 마오주의공산당은 이와 관련 제헌의회 첫 회기 중에 왕정 폐지와 공화제 전환을 선포한다는 계획이다. 갸넨드라 국왕에 대해서는 자진 하야를 종용하되 물러나지 않을 경우 강제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국왕의 '인도 망명설' 등이 잇따라 보도되자 네팔 왕실은 성명을 내어 "일부 국내 언론과 외신들이 악의적 보도를 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며 "그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 나라에 머물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AFP 통신 등 일부 외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갸넨드라 국왕이 일부 군부와, 국왕을 힌두신의 현신으로 여기는 힌두교 근본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앞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Pokhara) 지역과 안나푸르나 산군에 국한된 경험이었지만, 고산지대 어디를 가나 마오주의공산당이 민심을 '장악'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네팔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체로 왕정 철폐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네팔 왕실은 200년 넘게 네팔 주민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민주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앞둔 지금, 관광상품이나 전시용이 아닌 국왕 사진은 민간에서 딱 한 번 볼 수 있었다. 이미 민심은 왕실을 떠난 것이다.

트레킹 가이드인 딜리프 라이(36)씨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왕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왕실이 공식적으로는 네팔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국왕이 한두 달의 유예기간 내에 인도로 망명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인도와의 불편한 관계도 걸림돌

a  네팔의 산간마을에 붙어 있는 선관위의 총선거 포스터와 이를 '포위'한 마오주의공산당 표식.

네팔의 산간마을에 붙어 있는 선관위의 총선거 포스터와 이를 '포위'한 마오주의공산당 표식. ⓒ 김당


미국 등 서방과의 불편한 관계도 새정부의 걸림돌이다.

네팔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최대 강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이다. 특히 네팔은 서방의 대중국 관측기지로 활용되어온 티베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미국 등이 이번 총선 결과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미국은 그동안 마오이스트 반군이 집권하면 네팔이 국제테러 세력의 기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해 왔다. 미국은 여전히 마오이스트 세력을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마오주의공산당 정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외신에 따르면, 네팔 주재 미 대사관은 지난 2일 낸시 파월 미국 대사가 네팔의 전 마오이스트 반군 지도자이자 마오주의공산당 당수인 푸시파 카말 다할(일명 프라찬다)과 만났다고 밝혔다. 미국 관리가 미국에 의해 테러 그룹으로 분류돼 있는 마오이스트 반군 지도자와 회담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티베트의 분리 독립을 막아야 하는 중국으로서도 인접한 네팔의 협력이 절실하다. 중국은 이미 농지가 빈약한 네팔에 대한 식량 지원 등을 미끼로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카트만두 주재 대표부의 폐쇄를 이끌어낸 바 있다.

네팔 정부는 최근에도 카트만두에서 발생한 티베트 난민들의 티베트 유혈진압 항의시위를 신속히 진압한 바 있다. 또 네팔 당국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티베트에 자유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소지한 채 등반하던 미국인 남자를 강제 하산 조치하는 등 중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이름은 '마오주의공산당'이지만 중국 공산당과 교류는 없어

a  안나푸르나 산군지역 산간마을 촘롱의 티베트 난민 공예품 상점.

안나푸르나 산군지역 산간마을 촘롱의 티베트 난민 공예품 상점. ⓒ 김당


지난 4월초에 국가정보원은 네팔을 여행위험국가로 지정했다. 국정원 테러정보통합센터는 네팔에서 티베트인들의 시위가 진행중임을 근거로 네팔 여행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네팔에서 'Free Tibet'(프리 티베트)를 외치는 티베트인들의 시위에서 위험의 기미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7세기에만 해도 네팔은 티베트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 잃은 다수의 망명 티베트인들이 네팔 정부의 눈치 속에 난민들의 공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며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마오주의공산당은 가난한 농촌을 기반으로 공산혁명을 도모한다는 초기 마오쩌둥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네팔 정부의 '친중국' 성향이 더 가속화되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그러나 마오주의공산당이 중국 공산당과 어떤 유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 해 전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이 네팔의 마오주의공산당과 관계가 있느냐"는 외국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테러집단이 중국 수령의 이름을 훔쳐 쓰는 데 대해 분개해 한다"고 답했다.

마오주의공산당 역시 마오(毛) 사후 중국의 정책을 이념상 수정주의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 공산당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푸시파 카말 다할 마오주의공산당 당수는 지난해  중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우선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중국에 대한 우호감을 표시했다.

'프라찬다 동지'(Comrade Prachanda)의 실용외교

a  10년 전쟁 끝에이제 권력을 품은 '총구'를 내리고 '실용외교'로 무장한 프라찬다 동지.

10년 전쟁 끝에이제 권력을 품은 '총구'를 내리고 '실용외교'로 무장한 프라찬다 동지. ⓒ 네팔 TV화면


인도는 마오이스트 반군의 집권으로 자국내의 네팔과 인접한 비하르주를 중심으로 한 공산반군의 활동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에 대해 마오주의공산당은 이미 "집권해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겠다"고 천명하면서 그동안 소원해진 인도와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인 '프라찬다식 실용외교'를 전망케 한다.

전직 교사 출신으로 '프라찬다 동지'(Comrade Prachanda)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996년 도시 중심의 투쟁의 한계점을 절감하고 중국혁명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해 성공한 경험을 네팔의 산악지대에 적용한 '인민전쟁'을 선포해 총사령관으로 마오이스트반군의 10년 전쟁을 지도했다.

그 10년 전쟁 동안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3만명에 이르는 무장세력으로 네팔 영토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4월, 마침내 야당과 손잡고 절대왕정 폐지에 합의해 공동 임시정부를 구성한 지 2년만에 민중에 뿌리내린 선거 운동으로 제헌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는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고산지역의 마을 곳곳에 붙어있는 마오주의공산당 지지 포스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선관위에서 붙인 선거포스터 옆에는 어김없이 마오주의공산당 표식이 붙어 있었다. 외지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그만큼 마오주의들이 장악한 산간지역이 넓음을 의미했다.

네팔은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에베레스트(8848m) 등 8000m급 고봉 8개를 보유할 만큼 지형이 험준한 산악국가다. 그러나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브릭스'(BRICs)의 대표주자인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르고 있다.

239년의 왕정을 품어온 '세계의 지붕'에도 서서히 민주화의 봄은 오고 있었다. 이제 권력을 품은 '총구'를 내리고 '실용외교'로 무장한 '프라찬다'와 함께.
#네팔 #마오주의공산당 #프라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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