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뭘 그리 급하다고"

지하철 출입문에 팔 끼워 넣다 혼난 할머니

등록 2008.05.20 13:37수정 2008.05.2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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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히는 지하철 출입문에 발이나 팔을 끼워 넣는 것은 위험합니다 ⓒ 이승철

닫히는 지하철 출입문에 발이나 팔을 끼워 넣는 것은 위험합니다 ⓒ 이승철

"할머니, 대단히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런데 왜 급하게 차를 타느라고 그러세요, 위험했잖아요? 우리 나이쯤 되면 남는 게 시간인데 뭘 그렇게 서둘러요? 한 2~3분만 기다리면 다음 차 탈 수 있을 텐데. 쯧쯧"

 

19일 10시경, 서울메트로 4호선. 상계동 쪽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한성대 역에 섰다가 손님들이 모두 내리고 탄 후, 막 출입문을 닫는 중이었다. 마침 바로 앞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내려온 머리카락이 새하얀 할머니가 지팡이와 두 팔을 출입문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다.

 

"어머! 어머! 저를 어째!!!"

 

누군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닫히고 있던 지하철 출입문이 이 할머니의 양팔과 지팡이를 사이에 끼운 채 그대로 닫힌 것이다, 차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비슷한 또래의 다른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두 팔이 낀 출입문이 노약자석 옆이어서 마침 문 옆에 서 있던 이 할머니가 더욱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자 문 사이에 팔이 끼었던 할머니가 후닥닥 차안으로 들어섰다. 그 할머니도 놀랐는지 창백한 표정에 뛰어내려 오느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70대 중반이나 후반쯤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허리도 약간 굽고 몸놀림이 가벼운 모습이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 지하철이 출발했다. 그러나 만일 지하철 차장이 두 팔이 출입문에 낀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하고 출발했더라면 끔찍한 사고가 발생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곧 평상심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하철이 출발한 잠시 후였다. 놀라 비명을 질렀던 다른 할머니가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문에 팔이 끼었던 할머니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 젊은 사람도 아니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바쁠 게 뭐가 있다고 그리 서두른답니까? 계단 뛰어내려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리고 출입문이 닫히면 다음에 오는 지하철 타면 될 것을 그렇게 팔을 끼워 넣다니요? 만약에 그냥 출발했더라면 어쩔 뻔 했어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나무라고 있었다. 같은 또래 노인으로서 무모한 행동을 한 다른 할머니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할머니의 나무람을 들은 문제의 할머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다가 생각지 않았던 다른 할머니의 나무람을 듣는 것이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이 무모했음을 인정했는지 표정을 바꾸었다.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놀라게 해서,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네요."

 

할머니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고개까지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나무라던 할머니도 마음이 풀리는지 금방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세요,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보다 더 조심해야 하거든요, 우리 같은 늙은이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요?  미안합니다. 내가 공연히 심한 말씀을 드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 옳은 말씀인걸요."

 

옆에서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니 참 요즘 보기 드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 남의 일에 나서기를 아주 꺼려하는 것이 요즘 세상 풍조 아니던가. 그런데 무모한 행동으로 위험할 뻔했던 다른 할머니를 나무라는 할머니나, 또 그런 나무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다른 할머니의 태도가 여간 귀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떠들어대거나 거친 행동을 하는 사람들, 그런 행동을 누가 나무라거나 제지하려고 하면 심하게 반발하는 사람들, 특히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부 노인들의 행동과 비교하면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5.20 13:37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 #지하철 #출입문 #헐레벌떡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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