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시달리는데 아버지는 장가 들고

[역사소설 소현세자 49] 충신의 시대정신

등록 2008.05.20 15:41수정 2008.05.2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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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통명전. 창경궁에 있는 통명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지붕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하늘의 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하려는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통명전. 창경궁에 있는 통명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지붕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하늘의 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하려는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 이정근



왕세자를 죄인 다루듯 하는 청나라 장수


조선 길들이기에 나선 청나라는 더욱 고삐를 죄었다. 밤이 이슥한 술시(밤10시). 용골대와 마부대가 세자관에 들이 닥쳤다. 이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를 즐기고 있었다.

"세자는 문밖에 나와 맞이하라."

충직한 신하를 눈앞에서 목 졸라 죽인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세자가 문밖까지 나와 용골대와 마부대를 세자전으로 안내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황제의 명이다. 세자는 엎드려서 받아라."

용골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세자는 무릎을 꿇었다.


"조선의 군대는 왜 아직 오지 않은가? 지난 무오년 명나라가 불렀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 너희들의 군대가 아닌가? 너희 나라를 살려준 은혜가 명나라보다 큰대 우리의 명령을 소홀히 하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가 전란을 겪은 후 병졸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임금의 명을 거역하고 출동하지 않은 임광 대신 출정한 이시영 역시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를 친다는데 무슨 신바람이 났겠는가. 꾸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a 대정전.  중국 심양에 있는 황궁 대정전. 청나라는 이곳에서 각종 기념행사와 출정식을 가졌다.

대정전. 중국 심양에 있는 황궁 대정전. 청나라는 이곳에서 각종 기념행사와 출정식을 가졌다. ⓒ 이정근



"세자는 내일 당장 황궁으로 들라."

황제의 명을 남기고 용골대가 돌아갔다. 때 아닌 호출령을 받은 세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소현은 황궁으로 향했다. 세자관에서 황궁에 이르는 길목은 예전의 황궁거리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군사와 수레가 줄을 이었다. 서쪽 전선 어디에선가 대 결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황궁에 들어갔다. 궁궐 역시 평시와 달랐다. 수많은 군사가 대정전에 도열해 있고 장수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만월개를 만났다. 만월개는 후금시절부터 사신으로 조선을 드나들던 청나라 관리다.

"어젯밤에 황제의 교지가 계시어 놀랍고 두려워서 들어 왔습니다."
"황제께서 오늘은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리시느라 세자를 만날 겨를이 없습니다.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불러놓고서 돌아가란다. 완전 뭐 훈련시키는 격이다. 세자가 돌아 나오는데 용골대가 길을 막았다.

"너희나라 군대 초운(선발대)이 들어오면 묶어 보내려는 군대는 벌서 떠났고 2운(제2대)이 들어오면 함께 보내려는 군대도 지금 떠났다. 이제 너희 나라 군대는 필요 없다. 들어온다 해도 쫓아 보낼 것이다."

화가 난 청나라 장수 “조선군은 필요 없다, 돌아가라"

길길이 뛰던 용골대가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자관으로 돌아온 소현은 황급히 상장군에게 사람을 보냈다. 조선군을 이끌고 온 이시영은 혼하 강변에 진을 치고 입송하지 않고 있었다. 부하 5~6명을 거느린 용골대가 조선군 진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군은 돌아가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우리가 출동시기에 입송하지 못한 것은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듣기 싫다. 돌아가라."
"국왕께서는 정성을 다하여 입송하라 명하셨는데 실행하지 못한 것은 소장의 죄입니다. 우리는 양쪽 모두에 죄를 지었으니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국왕께 아뢰어 분부를 받은 후에 물러갈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라는 세자의 긴급지시가 약효를 발휘했다. 조선군이 '조선 국왕의 명이 있어야 움직이겠다' 하니 어떻게 할 것인가. 도리 없이 용골대가 돌아갔다. 이튿날 황제의 교지가 내려왔다.

"군대를 더 보내라."

세자관 으로부터 명을 전달 받은 조정은 평안병사 임경업에게 출동하라 명했다. 12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조선을 떠난 임경업은 전선으로 가는 도중 40여척의 병선을 빼돌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명했다. 대릉하를 거쳐 개주에 도착한 임경업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충심이 불러온 역풍

조선군의 전투 의지를 의심한 홍타이지는 조선 병선 3척을 차출하여 명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에 척후선으로 투입했다. 등주 앞바다에 침투한 임경업군은 정보수집은커녕 명나라 함대에 접근하여 조선군의 출동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청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 이는 홍타이지가 밀파한 감시선에 포착되었다.

대노한 홍타이지는 임경업군대를 조선에 돌아가라 명하고 임경업의 반청행위와 강화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질책했다. 당황한 조정은 2천명의 포수와 기병을 파견하는 것으로 무마했다. 명나라를 염두에 둔 조선 장수의 충심은 오히려 국가를 곤혹스럽게 했으며 훗날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용골대가 세자관을 찾아왔다.

"조선 국왕이 장가를 들었다 하니 그것이 사실이오?"
"네. 그렇습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산후통으로 승하한 인열왕후를 보낸 인조는 중전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곤위는 오래도록 비워두어서는 안되니 국모를 맞이하라고 대신들이 주청했으나 "계비는 예로부터 해독은 있으나 유익함은 없었다"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이는 사양이 아니라 임금을 치마폭에 감싼 숙원 조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a 가마.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가마.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이정근



이러한 임금이 어느 날 갑자기 금혼령을 내리고 장가들겠다고 나섰으나 규수를 내놓는 사대부집이 없었다. 괴이한 일이다. 국모의 자리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존심이 구겨진 인조가 "간택에 나온 처녀들은 모두 혼인을 허락한다"라고 하교 했으나 역시 응한 자는 없었다. 최명길이 품신했다.

"팔도의 수령과 사족 집안에 처녀가 있는 집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사람도 나오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고약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우선 추고하고 예조와 한성부의 당상을 파직하소서."

우여곡절을 거쳐 뽑은 규수가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 조씨다. 가례를 행하고 계비를 맞이한 인조는 숙의 장씨를 소의로, 숙원 조씨를 소원(昭媛)으로 상차했다. 세자빈 강씨와 함께 애증의 삼각관계를 이루는 진용이 탄생한 셈이다.

"자리가 비어있는 국모를 맞이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나 중전을 맞이하기 전에 상국의 책봉을 받아야 하거늘 순서가 틀리지 않았소? 책봉을 받도록 하시오."
"본국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자 책봉도 아울러 받도록 하시오."

중전 책봉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것은 난감한 일이다. 이미 소현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는가. 청나라의 세자 책봉을 받아들인다면 명나라의 책봉은 부정하는 꼴이다.

"그것도 본국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같이 본국에 전하겠다고 하니 여기에 와있는 세자는 뭐하는 것이오?"
"본국에는 지엄하신 부왕이 계시고 저는 이곳에 볼모로 와있는 세자입니다. 타의에 의해 이곳에 와있는 세자가 무슨 재량권이 있겠습니까? 국사를 본국에 전하는 것은 신하 된 도리입니다."

"신하의 도리 타령만 하는 조선 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서려는 용골대를 세자가 붙잡았다.
#소현세자 #가례 #임경업 #병자호란 #용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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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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