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함께 지리산 능선 길을 걷다

[도보여행]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를 거쳐 뱀사골 계곡 따라 걷기

등록 2008.06.09 20:16수정 2009.05.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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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한 지리산 ⓒ 유혜준


안개, 안개, 안개였습니다. 밝은 해가 떠오르고 깊은 어둠이 가시면 세상이 온통 환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어둠이 사라지자 짙은 안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안개는 차갑고 눅눅한 기운을 동반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안개가 호흡기를 통해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답니다.

지난 6일 새벽, 지리산 성삼재에서 그렇게 안개를 만났습니다. 이른 새벽에 산을 점령한 안개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길동무가 되어 함께 걸어 주었지요. 아니 미리 앞서가서 기다리고 있더이다. 성삼재를 출발해 노고단대피소를 지나 임걸령에 이를 때까지 안개는 산허리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으니까요.


지난 6일, 지리산 능선 길을 걸었습니다. 삼도봉을 지났고, 화개재도 지났으며, 철거작업이 얼추 마무리된 뱀사골대피소도 지났습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뱀사골 계곡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렇게 걸은 거리가 18km 남짓, 꼬박 9시간을 걸었지요.

이 날의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안개, 길동무가 되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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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성삼재 휴게소에서 출발한 시간은 새벽 6시. 이 시간에 지리산을 걸으려면 서울에서 전날 밤에 출발해야겠지요. 해서 버스 타고 5일 밤 11시 40분이 조금 넘어서 서울을 떠났답니다. 버스에서 토끼잠을 자고, 뱀사골 주차장에서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에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마쳤지요.

전날 내린 비로 성삼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길은 진창이었습니다. 길이 아무리 나쁘다하더라도 걷는 기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등산화가 흙투성이가 되긴 합니다만.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들리고, 일찍 깨어난 새가 종알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 소리, 한두 번쯤은 들어보셨겠지요?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에 이르는 길은 걷기 좋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도 됩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뱀사골 계곡까지 가는 길에는 화장실이 없답니다. 화장실이 없는 길을 최소한 6~7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네요. 남자들이야 화장실이 없어도 그리 아쉬울 것이 없지만 여자들은 어디 그러나요. 땀을 많이 흘리면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준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꼭 노고단대피소에서 화장실에 들러야합니다. 잊지 마세요.

안개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앞이 안 보이는 것 같다가도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길이 보이는 것이 신기합니다. 안개 속에서도 길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수 없이 많은 길을 만났습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지요. 수십, 수백, 수천의 길이 있습니다.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언제 걷느냐에 따라 길은 달라집니다.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길을 걷는 마음 역시 달라집니다.

안개 속에서 많은 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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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7시가 조금 넘어 노고단에 도착합니다. 뿌연 안개가 노고단을 휘감아들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안개를 헤치고 노고단 주변을 돌아보고 임걸령 방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수풀이 우거진 좁은 길을 걸으면서 주위를 둘러봅니다. 진창으로 변한 흙길 끝에 커다란 돌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번쩍 들어다 놓은 것 같습니다. 지리산에 살고 있다는 반달곰이 그랬을까요?

그러고 보니 지리산에 반달곰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혹시나 지금 이 길 끝에 반달곰이 서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반달곰과 정말 마주치면 죽은 체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걸음아 날 살려라, 달음박질을 쳐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반달곰을 살살 꼬드겨야 하는 건가요?

흙길이 지나니 돌길이 이어집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돌들은 푹 젖어 있습니다.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지면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주저앉는 것은 그래도 낫지만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 위에 엎어지기라도 하면, 불상사가 따로 없겠지요. 어휴, 겁나라.

촉촉하게 젖은 나무들이 싱그럽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물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비가 오는 것은 아닌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8시 40분에 임걸령을 지나고, 10시에 삼도봉에 도착합니다. 삼도봉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앓느니 죽지, 하면서 그냥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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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대피소, 흔적만 남다. ⓒ 유혜준


6일부터 8일까지 연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내리막길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합니다. 올라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올라갑니다.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무리지어 지나가기도 하고,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배낭 아래 달랑거리는 침낭을 보니 산에서 몇 박 할 작정인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대피소가 꽉 차면 '비박'을 하겠지요.

나무 계단이 나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계단, 계단. 500개가 넘는 계단이라네요. 이 길을 내려가니 다행이지, 올라간다면?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면서 서는 것 같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이 갑자기 안쓰러워 보입니다. 내려가고 내려가도 계단, 또 계단. 그래도 마지막 계단은 만나게 마련이지요.

화개재의 너른 풀밭에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작은 텐트가 쳐져 있는 것도 보입니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네요.

화개재 바로 아래에 뱀사골대피소가 있습니다. 철거가 얼추 끝나 건물은 사라지고 자재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마저 헬기로 실어가 버리면 대피소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인가요.

아, 이 곳에 화장실이 있네요. 그 쪽으로 가지 못하게 줄을 쳐놓긴 했지만 볼일이 급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요. 화장실의 유혹이 더 크지요.

철거가 끝난 뱀사골 대피소, 흔적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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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계곡 ⓒ 유혜준


뱀사골대피소를 지나 내려오다가 점심식사를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밥을 먹어야 기운을 내서 걷지요. 걷는 게 생각보다 열량이 많이 소모됩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도시락을 먹어치우고,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안개가 어느 사이엔가 걷혔습니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진 안개 대신에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어디선가 호로로, 새소리가 들립니다. 깊은 산 속이라는 실감이 갑작스럽게 납니다.

뱀사골대피소에서 뱀사골 입구까지 내려가는 길은 돌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돌, 돌, 돌. 크고 작은 돌이 우툴두툴 이어진 길은 거의 9km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쩐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더라니.

그 길, 걷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흙길이나 숲길은 잘 걷겠는데 이 돌길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돌 위로 자빠지고 엎어질 것만 같아 발에 힘을 주고 걸었더니 나중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군요.

그래도 뱀사골 계곡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계곡에는 물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물줄기와 크고 작은 소(沼)들. 자연이 그리는 그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간장소를 지납니다. 예전에 부보상(보부상)들이 중산에서 화개재를 넘어 오다가 이 소에 빠져 소금이 녹았답니다. 소금장수들이었나 봅니다. 소금이 녹았는데 물 색깔이 간장 빛이어서 간장소라 불렀다고 합니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물 빛깔은 변하지 않는데 뻥이 좀 심하지요?

소금이 녹아 간장소가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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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연주회가 열리다. ⓒ 유혜준


아름다운 자연이 있으면 음악이 있어야 구색이 맞지 않을까요? 물론 자연이 빚어내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귀를 맑게 해주지만 말입니다.

닉네임이 '하모니카'인 일행 한 분이 즉석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멋있게 불어주신 것이지요. 산 속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듣는 맛은 아주 각별했답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말, 실감이 팍팍 났습니다.

탁용소를 지납니다. 큰 뱀이 허물을 벗고 용이 되어 하늘을 올라가다가 떨어져 자국이 생겨났는데 그 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탁용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승천하다가 떨어졌으면 용이 되지 못했겠지요? 뱀이 용이 되지 못하면 이무기가 된다던데 혹시 탁용소에 그 이무기가 아직까지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요룡대를 지나니 너른 길이 나옵니다. 뱀사골 계곡길이 끝난 것이지요.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돌길도 끝이 있군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야 정해진 이치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오전 6시에 시작된 도보여행은 오후 3시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아홉 시간을 걸었지만 걷고 나니 아쉬움이 길게 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서서 뱀사골 계곡을 되짚어 올라가?
#도보여행 #지리산 #성삼재 #노고단 #뱀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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