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가능한 대책이 정책이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63]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대부들의 눈

등록 2008.06.19 18:32수정 2008.06.1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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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청나라 사신이 거드름을 피우며 지나 다녔던 창경궁 옥천교와 명정문. 옥천교는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다. ⓒ 이정근


청나라 사신이 떠났다. 조선을 괴롭히던 칙사가 한성을 떠나 홀가분했으나 조정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삼전도 항복 못지않은 패배감이 조정을 엄습했다. 대소신료들은 공황에 빠졌고 일손을 놓았다. 북벌 의지를 불태우며 수축한 남한산성을 헐라는 것은 조선의 저항의지를 꺾는 것이었고 한 가닥 희망마저 버리는 것이었다.

선물 보따리를 가득 실은 수레를 이끌고 마골대가 의주에 도착했다. 헌데 자신이 심양에서 타고 온 말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압록강을 건너온 마골대는 자신의 말을 의주에 맡겨두고 한성을 다녀왔는데 죽어있었던 것이다. 전장을 누비던 애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마골대가 의주부윤 황일호를 질책했다.


"왜 말이 죽었느냐?"
"잘 돌보았는데 병들어 죽었습니다."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말이 병들어 죽었다는데 마골대도 할 말이 없었다. 죽어 있는 말을 살펴보던 마골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벅지에 칼자국은 무엇이냐?"
"잘 모르겠는뎁쇼."

의주부윤이 우물쭈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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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말은 오늘날의 자동차 이상의 교통통신 수단이었으며 기호품이었고 전략물자였다. ⓒ 이정근


전장을 누비던 애마다, 말을 죽인 범인을 잡아내라


"이 고을 수령이라는 작자가 모른다니 말이나 되느냐? 말을 먹이던 놈을 잡아 와라."

마구간을 담당하던 아전과 말 먹이던 노복이 부복했다.


"어찌된 일이냐?"
"귀신에 기도드리기 위해서 떼어냈습니다."

노복이 실토했다.

"이런 몹쓸 놈들이 있나? 내 말을 죽이고 성황(城隍)에 나를 저주하였으니 찢어 죽여도 죄가 남는다. 급히 국왕에게 치계하여 말을 지키던 자와 부윤의 죄를 다스리고 심양에 즉시 보고하라."
"알아 모시겠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반송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칙사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뇌물을 안겨주었던 뇌물공세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쳐했다. 반송사의 보고를 받은 인조는 비변사 회의를 열었다.

"말을 지키던 자의 입에서 고기를 베어 귀신에 기도하였다는 말이 나와 마골대가 진노하고 있으니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을 지키던 자와 의주부윤 황일호를 붙잡아 와 중하게 다스린 다음 결과를 심양에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비변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기구인지 청나라의 대표부인지 알 수 없다.

"황일호를 붙잡아 오라. 그리고 양서(兩西)에 선전관 두 명을 파견하여 각 고을에 숨어 사는 도환인(逃還人)을 색출하여 청나라 사신이 가는 길에 내어주도록 하라."

마골대의 말이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 표출이 의외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애꿎은 명나라 망명객들만 벼락을 맞았다. 인조는 금부도사를 의주에 보내 황일호를 한성으로 압송하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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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항복. 서울 송파구 삼전도에 있는 부조.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은 이 자리에 없었다. ⓒ 이정근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의리를 저버린 반역은 따를 수 없다

삼전도 항복 이틀 전 낙향하여 안동에 은거하고 있던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큰 뜻을 가지고 와신 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지십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축년 이후로 명나라 사람들이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데 천자(天子)의 육사(六師)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특별히 용서해 주고 있는 까닭은 명나라가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하여 패배하였다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이 아니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태조대왕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대왕께서는 지성으로 사대하여 임진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군병을 파견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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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갑곶 강화도는 병자호란 당시 함락되었으나 지리적인 특성상 천혜의 요새로 인식하고 있었다. ⓒ 이정근


강화도에 요새를 마련하고 지는 해와 연대하자

김상헌의 상소에 뒤이어 경상도 함창 유생 채이항이 상소하였다.

"오늘날 국가의 일을 보건대 나라가 망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국가를 피폐하게 하고 재물을 쏟아 부어 저들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다 보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재물은 바닥나고 힘이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지금 서둘러 그 길을 되돌려 재물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기 전에 보존할 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강화도의 천연 요새를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삼남을 이끌어 조운을 하는 한편 명나라를 치려던 주사(舟師)로 하여금 방비하게 하소서. 또한 우리의 계책을 명나라에 알려 산해관에 있는 대군으로 하여금 배후를 공격하는 형세를 보이면 저들의 형세는 약해지고 우리의 형세는 강해져서 저들이 세자와 대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안은 많았으나 대책은 없었다. 유효 가능한 대책이 입안되었을 때 정책이 된다. 청나라 사신의 말 한마디에 성을 헐라는 군주. 사신에게 뇌물 바치기에 급급한 대신. 국정최고 자문기구로 등장한 비변사의 엎드림. 오합지졸이 지키고 있는 어영청과 훈련원 군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결의를 표하는 장군마저 없는 이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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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지는 해가 서산에 걸려있다. ⓒ 이정근


대륙의 맹주 명나라는 민란과 자중지란을 겪으며 좌초 위기에 놓여 있었다. 북경 정권을 떠받치던 지방 토호세력이 성장하여 향신(鄕紳)이라 불리며 백성들을 수탈했다. 도적떼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고영상이 틈왕(闖王)이라 자칭하며 황제를 농락했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백성은 등을 돌렸고 명나라는 지는 해가 되었다.

만주 벌판의 신흥강국 청나라는 북방과 동방을 평정하고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무적의 팔기군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만리장성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다. 명나라로부터 '북노남왜'라고 경계를 받았던 일본은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늙은 호랑이에게 덤빌 수 있었다. 하지만 도꾸가와 이에미쯔는 청나라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거병하지 않고 국력을 내치에 집중하여 에도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정학적 위치상 조선은 원하던 원치 않던 국제 역학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태풍 피해를 줄이려면 태풍의 눈을 보아야 한다. 눈의 위치를 정확히 보았을 대진로를 예측할 수 있다. 허나, 대륙을 바라보는 조선 사대부들의 감각기관은 무뎠다. 북경에 편향된 안테나는 용량 부족이었고 더듬이는 낡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야밤에 맹인이 앞 못 보는 말을 타고 내(川)를 건너는 것과 흡사했다.
#사신 #칙사 #옥천교 #김상헌 #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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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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