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먹을래? 불사리 먹을래?

등록 2008.07.05 14:29수정 2008.07.0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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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사로 아들을 데리고 집사람이 볼일 보러 나갔다. 배고프다는 우리집 서열 2위인(손주 때문에 밀렸다) 아들 말에 화들짝 놀란 집사람은 나에게 밖에서 식사하지 않겠냐는 전화를 넣게 하였다.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부쩍 냉면 타령하던 것이 생각나 의정부 한 냉면집으로 가자 하였다

 

'한 촌사람 하로는 성내와서 구경을 하는데…'로 시작되는 박태준 작사의 '냉면'을 보면 '싸다, 물냉면, 불냉면, 비빔냉면, 회냉면, 냉면가닥이 길고 질기다(콧구멍으로까지 나오니까)' 등 '싸다'를 제외하고는 냉면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언젠가 경상도산(産) 사위와 함께 장충동 평양면옥 집을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맛있게 먹었으나, 사위 얼굴은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물으니 '그런 걸 무슨 맛에 먹냐'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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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에서 버무려 온 불고기. 선도가 괜찮고 육수를 푸짐하게 넣어준다. ⓒ 이덕은

즉석에서 버무려 온 불고기. 선도가 괜찮고 육수를 푸짐하게 넣어준다. ⓒ 이덕은

 

서울에도 평양냉면 잘한다는 집들이 여럿 있으나 기실 그 맛이 제대로 된 이북냉면 맛인지는 확실치 않은 듯하다. 실향민들이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맛을 보고 '싱겁다'는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오랫동안 분단되어 원래의 맛은 조금씩 변화되고 상상 속에 자신의 맛을 만들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육수 맛은 대개 비슷하게 맞출 수 있다 해도 평양냉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리 맛 아닌가 하는데, 내가 먹어 본 바로는 순수한 메밀보다도 비전(秘傳)의 부재료가 약간 가미된 것이 입맛에 맞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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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반찬 ⓒ 이덕은

밑반찬 ⓒ 이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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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넣어 먹어도 괜찮을 물김치와 쪽파무침. ⓒ 이덕은

국수를 넣어 먹어도 괜찮을 물김치와 쪽파무침. ⓒ 이덕은

 

누가 '분위기로 먹는 음식이 있다'라고 한다면 전적으로 동의해주고 싶은 음식이 냉면이다. 냉면 먹기의 진수는 편육과 냉면김치나 동치미 얇게 썰은 것과 사리를 함께 젓가락으로 집어 한가득 입 속에 넣고 씹으며, 냉면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시원한 육수를 훌훌 같이 들이키며 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게 중독성이 매우 강해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먹으면 냉면 한 그릇 후딱 비우게 되니 요즘처럼 커다란 그릇에 육수를 붓고 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처럼 사리가 떠있는 냉면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 남들이 이제 식초니 겨자니 넣고 비비고 있을 때 눈을 껌벅이며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게 되니 민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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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리를 먹기 위한 불판은 아래처럼 가운데가 불쑥 올라와야 고기 구우며 나온는 육즙이 모이고 고기는 고기대로 바싹 익는다. 고기와 육수가 범벅이 되어서야 불사리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 이덕은

불사리를 먹기 위한 불판은 아래처럼 가운데가 불쑥 올라와야 고기 구우며 나온는 육즙이 모이고 고기는 고기대로 바싹 익는다. 고기와 육수가 범벅이 되어서야 불사리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 이덕은

 

우선 불고기를 시킨다. 육수를 듬뿍 담아 온 불판. 그러나 불구멍이 없고 납짝한 얇은 '스텡'으로 만든 불판은 입맛을 반감시킨다. 그럴싸하게 즉석에서 버무려 온 불고기를 아줌마는 육수 맛이 좋아진다며 자꾸 육수 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그래서 가운데가 불쑥 솟아 올라와 고기가 노릇하게 구어지면 육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두꺼운 놋쇠 주물 불판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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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기름으로 무친 쪽파가 쌈맛을 더욱 맛깔지게 만든다. ⓒ 이덕은

들깨기름으로 무친 쪽파가 쌈맛을 더욱 맛깔지게 만든다. ⓒ 이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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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없단 말이 아니라 내 기대에 좀 못미친 냉면. 육수 맛은 좋으나 사리의 깊은 맛이 덜해서 주객이 전도됐다는. ⓒ 이덕은

맛이 없단 말이 아니라 내 기대에 좀 못미친 냉면. 육수 맛은 좋으나 사리의 깊은 맛이 덜해서 주객이 전도됐다는. ⓒ 이덕은
 
냉면을 시켜보니 사리 특유의 향과 깊은 맛이 덜하고 밍숭밍숭한데 대신 육수는 다른 냉면집보다 짙은 맛을 낸다. 함흥냉면에 길들여진 입맛에는 괜찮은 맛이 될 듯도 한데 내 입맛에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사리를 따로 시켜 불판의 육수에 건져 먹는 불사리가 차라리 낫다. 이제서야 불판에 육수를 듬뿍 넣고 자꾸만 불고기를 육수쪽으로 밀어 넣는 아줌마의 깊은 뜻이 헤아려지지만, 아무래도 육수는 육수, 불고기는 불고기다. 그럴 바에는 요즘 '뚝불'이라는 것처럼 냄비에 고기를 넣고 끓여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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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은 변하는가 보다. 마늘, 부추, 돼지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에는 좀 싱거운 맛이다. ⓒ 이덕은

입맛은 변하는가 보다. 마늘, 부추, 돼지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에는 좀 싱거운 맛이다. ⓒ 이덕은

 

만두국도 한 그릇 시켰으나 기계로 빚은 것 같은 만두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집사람은 엄마가 빚어 준 만두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마늘과 부추가 듬뿍 들어간 만두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기인한다. 이 집에 특별한 반찬이 하나 있는데 오이지를 김치처럼 버무린 오이지김치와 오이지를 오이 대신 넣고 버무린 샐러드이다. 마치 시어빠진 오이소박이가 연상되는데 오이소박이는 아니고 오이지가 틀림없다. 오이지 김치는 오이지를 신 깍두기 국물에 발효시켜 먹는 맛이고, 샐러드의 오이는 당연히 소금에 잠시 절인 오이가 아삭하게 씹히겠거니 하다가 엉뚱하게 오이지가 터지는 맛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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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집에 가보면 이렇게 편육 하나 시켜 둘이서 소주 한 병들고 냉면 한 그릇씩 드시는 어르신이 꽤 된다. ⓒ 이덕은

냉면집에 가보면 이렇게 편육 하나 시켜 둘이서 소주 한 병들고 냉면 한 그릇씩 드시는 어르신이 꽤 된다. ⓒ 이덕은

 

역시 냉면집은 나이드신 분들이 많이 온다. 내가 갔을 때에도 냉면과 편육을 들고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 소모임이 꽤 많았다. 얼마 안 있어 나도 저 대열에 합류하여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닥다리즈(연세56치과)포토갤러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7.05 14:29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닥다리즈(연세56치과)포토갤러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냉면 #불사리 #만두국 #의정부평양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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