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의 12시간 버스 여행!

좌충우돌 필리핀 출사 원정기 - ⑤

등록 2008.07.10 21:16수정 2008.07.1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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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50분. 땅거미가 자욱한 시간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진다. 큰 형님이 창성 형님과 내가 자는 방문을 두드리기 전인데도 스르르 깨버렸다. 새벽 5시에 바기오 행 버스를 타야하는 바나우에 출사단! 부지런히 호텔을 나선다.

'언덕 위의 그림 같은 호텔, 다시 올 수 있을까?'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 그런데 사람들이 없다. 큰 형님이 어제 밤 동분서주 알아낸 버스시간이 결국 틀린 것일까? 이 곳 정류장엔 버스 시간표 따윈 없었다.

"버스 시간이 있긴 하지. 그래도 기사 마음이야. 십분도 좋고 이십분도 좋고 기사가 늦으면 늦는 거고 그걸로 성질 내는 사람도 없고."

몇 분 늦는다는 것만으로도 조급했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 갔다. 하지만 여기서 버스가 늦는 건 세 가지 점에서 아주 달가운 일이었다. 하나는 오늘 12시간 이상 계획된 버스 여행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는 점! 둘은 동이 트는 것을 지상에 서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우린 동 틀 때마다 버스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새벽에 장(오늘이 장날인가 보다)이 서는 걸 구경할 수 있다는 점!

a  사가다 장서는 날!

사가다 장서는 날! ⓒ 고두환


결국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에 짜증나기보단 어린아이처럼 좋다고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일당들. 큰 형님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 때문에 불안해 하며 근처에서 놀라고 하지만 이미 모두들 시선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a  서서히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사가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사가다 ⓒ 고두환


붉은 물결이 하늘에 퍼지는 순간, 부끄러운 해는 구름 뒤에 숨어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어디선가 바나나 잎사귀에 쌓인 떡을 사와서 건네는 장미의 손. 푸른색 바나나를 사서 건네는 큰 형님의 손. 거대한 영화관에서 간식을 사기지고 일출 장관을 즐기고 있었다. 사가다 어느 동네의 언덕빼기쯤에서.


이곳 장도 우리 재래장처럼 없는 물건이 없다. 먹을 것, 입을 것, 닭과 개, 그리고 영화 CD와 학용품도 곳곳에 엿보인다. 천막을 치고 장사할 자리를 잡는 도중에도 낮선 이방인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걸 잊지 않는 필리피노들. 산골의 쌀살한 새벽에도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그들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


"어쩔 거야. 완전 털털이 버스다!"

일행들이 한 숨을 쉰다. 위 아래로 열고 닫는 창문, 검표원이 문을 열고 닫는 우리나라 70년대 버스가 위용을 자랑하며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샌가 모여든 필리피노들과 함께 우린 만원버스에 몸을 실었다.

a  바기오로 가는 길!

바기오로 가는 길! ⓒ 고두환


지금 시각은 오전 6시(결국 어제 필리피노는 한 시간이나 일찍 버스 시간을 알려준 셈이었다). 150㎞ 정도를 달려가는데 무려 7시간이나 걸린단다. 그렇다면 필경 길이 엄청 꼬불꼬불하다는 소리! 하지만 모든 것을 초탈한 우리는 주변의 자연 경관을 살펴보며 버스와 서서히 동화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을 오르락 내리락, 길이 꼬부랑 저부랑. 버스는 요동치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번 필리핀 여행을 통해 확실히 느낀 것은 버스가 무지 튼튼하다는 것! 그나저나 장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잿빛처럼 허옇다고 시뻘겋게 상기됐다. 안절부절 못하며 점퍼에 달린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한다.

"오빠, 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야?"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도통 버스가 쉬질 않아!"

큰 일이다. 양 옆으론 수풀밖에 펼쳐지지 않는 곳을 두 시간째 지나면서 버스가 도통 설 생각을 안하는데 장미의 표정은 꽤 심각한 것 같다. 옆에서 농담을 건네며 장미를 진정 시키려던 산소녀도 서서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오빠, 빨리 검표원한테 화징실 좀 어딨냐고 물어봐줘!"
"내가? 그래 알았어."

결국 난 망설이다가 만원버스에 그를 불렀다.

"I want go to the comfort room!"

생각보다 크게 외친 내 절규에 버스 안은 온통 웃음바다였다. 앞자리에서 눈을 붙이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깬 큰 형님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부터!

모두들 화장실이 어딨냐고 물어본 내게 시선을 집중하는 게 아닌 장미를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람의 상태를 보고 누가 급한질 대번에 알아챈 것이다. 20여 분 동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강의하고 토론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낸 장미, 드디어 선 휴게소에서 오랫동안 볼일을 보기에 이른다. 물론 그 20여 분 동안 필리피노들은 수풀을 손가락질 하며 빨리가서 일을 보라고 오라고 권유하고, 차를 멈춘 다음에 급하게 일을 해결하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권유를 수도없이 했지만.

a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C.R(comfort room - 화장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C.R(comfort room - 화장실)! ⓒ 고두환


결국 모든 이가 지켜보는 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 뻔 했던 장미는 휴게소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하며 한 손엔 알새우칩, 다른 한 손엔 게토레이를 사들고 당당하게 버스로 탑승했다. 하지만 '쿡쿡' 웃는 승객들의 웃음까진 우리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사실! 이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 몇 시간 동안 이동하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오늘은 밤 늦도록 버스를 타야 한다는데. 다행인 건 창문 밖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

a  바기오로 가는 길. 산 속에서 유영하는 구름들

바기오로 가는 길. 산 속에서 유영하는 구름들 ⓒ 고두환


구름은 산과 마을에 묘하게 걸쳐서 뒤덮고 있으며, 오랜만에 청명한 하늘에 하연 구름을 잘 풀어놓은 이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풍경과 더불어 우린 바기오로 도착했다.

도착한 바기오 터미널(사가다에서 마닐라로 가기위해선 바기오를 경유해야 한다). 곳곳에 보이는 한국인과 시꺼먼 매연이 뒤덮은 도시. 교통 체증은 보는 이마저도 질리게 만드는 이 곳은 인근에서 꽤 큰 도시로서 한국 유학생이 많은 도시란다. 그나저나 살인적인 매연은 코와 목을 답답하게 만들고 사리진 편두통을 다시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휴지를 꺼내서 코를 푸니 정말 시커먼 콧물이 휴지를 덮는다.

우린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바기오 SM(필리핀 최대의 쇼핑몰)으로 이동했다. 필리핀의 대중 프랜차이즈에 가자고 우릴 이끄신 큰 형님. 옐로 캡(yellow cap)이라는 피자 가게에 우린 자릴 잡았다. 어느샌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제법 굵어졌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차라리 비가 오니 상쾌한 기분이 든다. 일단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니 조금 상쾌해진다. 시골에서 볼 수 없었던 쾌적한 화장실을 보니 며칠 안된 시간에 어색하기까지 하다.

이곳에선 엄청 큰 피자와 치킨, 감자와 스파게티가 메뉴로 나왔다. 하지만 기름이 줄줄 흐르는 음식,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맹맹한 음식 앞에서 우리의 실망감은 컸다. 다들 주린 배를 움켜지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음식은 많이 남았다. 산소녀는 요거트 하우스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계속 되뇌이고 식성 좋은 창성 형님도 이내 손을 털고 일어나셨다.

a  마닐라 행 버스

마닐라 행 버스 ⓒ 고두환


이렇게 한 숨 돌린 우리는 다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이제 6시간여를 달려야 메트로 마닐라에 도착한다는 큰 형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산소녀와 창성 형님의 바람넣는 목베개를 부러워하며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두시간 후, 우리는 1차 휴게소에서 섰다. 석양이 지는 모습, 끝내 필리핀에서 구름 끼지 않은 일출과 일몰은 보지 못했지만 지평선에 구름과 함께 걸쳐있는 붉은 노을이 자못 운치있었다. 하지는 이내 어두어진 필리핀, 어둠과의 지루한 버스여행이 이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a  호텔방

호텔방 ⓒ 고두환


밤 11시. 드디어 메트로 마닐라 어디쯤에 우리 일행이 내렸다. 큰 형님과 산소녀, 장미가 먼저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 창성 형님과 훈 형 나는 뒤이어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간단히 짐만 풀러 올러간 호텔, 입구부터 으리으리 하더니 방은 환상이다. 끝내주는 시설과 야경을 가진 방, 필리핀에 와서 냉장고 있는 방은 처음이었다

"형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먹으니까 너무 신기해요."

올망졸망 신기한 눈으로 맥주를 바라보는 나,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맥주가 한 두캔씩 돌고 훈 형과 산소녀는 벌써부터 월요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훈 형은 월요일날 연가를 냈다지만 산소녀는 당장 출근해야 할 상황, 나 역시 잠깐 일하는 곳이라지만 다들 바쁜데 혼자만 여행 왔다는게 조금씩 찔리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드디어 필리핀에서의 내 인생의 스승, 큰 형님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가이드도 아니시면서 필리핀 관광청에 특별한 부탁 덕에 갑자기 나오신 큰 형님. 젊은이들의 시시비비 투정과 철부지짓을 너털웃음으로 받아주시며 아무 사고 없이 출사를 이끌어준 형님의 뒷모습에 크게 손 흔들며 창성 형님과 방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필리핀에서 기나긴 버스여행은 저물고 있었다. 내일이면 필리핀과 헤어져야 하고, 바나우에 출사단과 이별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유영하던 내 사색을 잠시 끊어야 할지도. 아마도 조금더 성숙한다면 이런 기분을 즐기며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오늘 별다른 관광지를 본 것도, 별다른 경험을 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 한국에 돌아가면 그리울 것이다. 하찮은 풍경과 공기와 사람들의 미소까지도.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CASTO #버스여행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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