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11일) 순천 ㄱ중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학교 연수에 강사로 초청이 되어 황송스럽게도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강사 소개까지 받았습니다. 지난달에는 순천 ㄷ중학교를 방문하여 학교 도서실에서 예비교사인 교생 선생님들까지 모셔놓고 강의를 했습니다. 같은 교사로서 강사 자격으로 선생님들 앞에 선다는 것은 퍽 가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강의가 있기 일주일 전쯤 원고를 보내드리고 선생님들 앞에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낼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몇 해 전인가는 <우리교육>이 주관하는 연수에 강사로 초빙되어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전국각지에서 오신 교사들 앞에서 이렇게 첫 말문을 열었었지요.
"여기 올라오면서 방학이긴 하지만 교장 선생님께 보고를 드려야할 것 같아서 학급운영에 관한 강의를 하러 서울에 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자기 학급이나 잘 단속할 일이지…하는 그런 표정이셨지요."
청중의 웃음을 유도하기 위한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교장선생님께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에게도 나름대로의 교육관이 있겠고,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교육관은 '자유'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한 아이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가 교사로서 품고 있는 철학이요 신념이지요.
저는 학교를 '자유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주곤 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가장 억압하는 곳이 바로 학교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를 관리하는 교장선생님과 저와의 불편한 관계는 숙명처럼 예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해준 말입니다.
"요즘 인터넷 소설을 많이들 보는데 좋습니다. 그런데 음식도 편식을 하면 좋지 않아요. 지금 학교 도서실에 만 권이 넘는 책들이 있지만 편식에 길들여진 여러분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책들입니다. 그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유의 연습이랄까요? 좀 지루하고 딱딱하다 싶어도 참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이 재미있어 집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 도서실에 있는 만 권의 책이 다 여러분의 책이 될 테니까요. 고등학생이 고등학생 수준에 맞는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자유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이런 내밀한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신뢰해야 하고, 또한 아이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하면 아이들이 알아먹기나 하겠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 자신도 가끔은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이니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입니다. 정신적으로 나약해 보이는 아이들도 존재감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는 있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통제가 만능인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힘이 들고 외로운 일이긴 합니다. 학교 관리자의 눈에는 그런 내밀한 풍경들이 포착되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하지만 아이들도 '작은 자유인'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데 선생이 되어가지고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할 일은 아닙니다. 아니, 의기소침하다니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조금씩 자아가 커가는 아이들을 만나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한참 출석을 부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며 이렇게 요란을 떨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 눈이 빛나고 있어요!"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다보니 맨 앞에 앉은 아이의 눈에 제 눈 속 표정이 포착된 모양입니다.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으니 눈이 빛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말이 너무도 반갑게 들렸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데,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그때가 바로 제 오랜 열망이 이루어진 순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 전 일입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너무도 산만하고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서 수업이 끝나자 한 아이를 교무실로 데려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이런 아이들 아니었잖아. 아무래도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은데 얘기해주지 않겠니? 잘못이 있다면 내가 고치려고 그래."
처음에는 그런 거 없다고 딱 잡아떼던 아이가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얘기하자 뭔가 결심한 듯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애를 바라볼 때만 눈이 빛나요!"
이름이 아닌 '그 애'라고 말했음에도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것을 보면 제가 '그 애'를 편애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저는 한 아이가 아닌 모든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눈이 빛나는 선생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인간됨됨이가 부실하고 자기중심적인 구석이 여전하여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름을 불러주고 나서야 조금씩 진전을 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저에게 '자유의 연습' 같은 것이었지요.
교사가 아이들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없다면, 특정한 아이에 대한 미움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면,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만 눈길이 간다면 결코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는 성장을 위한 곳입니다. 아이들도 자라지만 교사가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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