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너도 내 애인이 좋아졌겠지?

[사는이야기] 편지로 쓴 지리산 종주기

등록 2008.08.06 10:20수정 2008.08.0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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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고단 가는 길에 피어 있는 꽃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노고단 가는 길에 피어 있는 꽃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안준철

편지가 늦었구나. 어깨가 조금 아팠단다. 그렇다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지리산 종주를 했기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산을 다녀오고 나니까 아팠던 어깨가 많이 풀려 있었지.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에 감탄할 정도였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원고를 쓰고 나니까 어깨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하는 거 있지.

편지를 쓰고 나면 다시 산에나 가야 할까 보다. 내게 산은 자연의 또다른 이름이니까.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말이 있지. 산에 갈 때마다 그리운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아마 그래서 일 거야. 이번 지리산 종주를 통해 너에게도 영혼의 고향이 생긴 셈이니 축하한다.

다리가 퉁퉁 붓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산을 타본 적도 없다면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박3일 지리산 종주를 감행했으니 후유증이 생길 만도 할 거야. 참, 기억나니?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편지 형태로 쓰고 싶다고 했던 거 말이야. 물론 그 주인공은 바로 너지. 난 너에게 편지의 첫 구절까지 미리 말해주었었지. 바로 이거였어.   

"천왕봉에 거의 다 와 갑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올라가세요."

우린 그 때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 올랐다가 내려오던 중이었지. 우리가 삼십 분은 넘게 내려왔으니까 한참을 더 올라가야 정상에 닿을 텐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 그래도 그분에게는 도움이 되었을 거야. 우리도 그런 식으로 높은 계단을 손쉽게 오르곤 했었으니까. 한 계단만 생각하고, 또 한 계단만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지.

질투할 줄 모르는 나의 애인

 지리산에서만 그 뛰어난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산수국은 마치 선녀가 두고간 청보석 같다.
지리산에서만 그 뛰어난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산수국은 마치 선녀가 두고간 청보석 같다. 안준철

사실,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지만 지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넌 첫 산행이 지리산 종주였으니 오죽이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다 보니 산행 첫날부터 일행들과 자꾸만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벽소령을 지날 무렵에는 지리산 종주를 포기할까도 했었지. 뜻밖에도 네가 가상한 의지를 보이는 바람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소설가이신 네 엄마도 마음을 굳히셨지만. 그런 와중에 엄마와 이런 대화는 나눈 기억이 나는구나.     

"지금까지 지리산에 온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우리가 걸음이 가장 늦을 거예요."
"맞아요. 우리는 지금 가장 인간적인 속도로 걷고 있는 거라고요."


체력이 달려서 걸음걸이가 늦어진 것을 변명삼아 우스개로 한 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 산을 빨리 오르내리다 보면 지나치기 쉬운 꽃이나 나무들에 반가운 눈인사를 해주곤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친해진 것도 그 '인간적인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말이야.

난 산을 좋아하지만 산을 빨리 오르는 편은 아니란다. 나이도 있고 체력도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하는 심정이랄까? 산이 좋아서 산에 왔는데 서둘러서 바삐 산을 떠나는 것은 좀 그렇잖아. 너도 나에게 조금은 물이 들었는지 산에서 내려오면서 이렇게 말했지.

"두 시간이면 산행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요."
"그 사이 네가 산을 좋아하게 된 모양이구나."
"아마 그런가 봐요."
"그럼 우리 꽃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내려가자."
"호호, 그래요."

아마 그랬을 거야. 네가 산을 좋아하고 산과 친해지고 있는 동안 나도 너를 좋아하고 너와 친해지고 있었을 거야.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 거기에 조금씩 어떤 애틋한 감정이 스며들어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 그것만큼 삶에서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도 없을 거야. 그런 경험이나 교감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단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질투할 줄 모르는 애인을 두는 셈이랄까?

아름답고 영롱한 보석 전시장이 된 밤하늘의 황홀한 우주쇼

 자연생태계 보호를 위해 출입이 간헐적으로 허용되는 노고단에는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노고단 대피소다.
자연생태계 보호를 위해 출입이 간헐적으로 허용되는 노고단에는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노고단 대피소다.안준철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노고단에서 찍은 사진이 많더구나. 고백하자면 난 그 날 노고단을 처음 올라가본 거란다. 여러 차례 노고단에 왔었지만, 그 동안은 노고단 주변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진짜 노고단 대신 가짜(?) 노고단에서 사진을 찍곤 했었지.

노고단(老姑壇)이란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더 자세한 것은 엄마가 소설가시니까 물어보면 잘 알려주실 거야.    

'지리산 종주'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약 25.5㎞ 구간을 산행하는 것인데, 거기에 노고단 정상까지의 거리와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거리까지 합하면 무려 백 리(40㎞)가 족히 되거나, 하산 코스에 따라 백 리가 넘을 수도 있는 아주 먼 거리란다. 이제 너도 다녀왔으니 우리가 가쁜 숨을 내쉬며 발을 내딛고 올랐던 지리산 종주 코스를 환히 알 수 있겠구나.

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토끼봉-연하천(1박)-벽소령-선비샘-세석산장-연하봉-장터목(2박)-제석봉-천왕봉-소지봉-하동바위-백무동

연하천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지. 밤이 되자 흐린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어릴 적엔 일상처럼 매일 바라보던 북두칠성이 먼저 선을 보이더니 삽시간에 밤하늘은 아름답고 영롱한 보석 전시장이 되고 말았지.

그 황홀한 우주쇼를 고개가 아프도록 감상한 기억밖에는 없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마치 벌에 쏘인 자리처럼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있지 않았겠어? 나는 생각했지.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 벌에 쏘인 것일까? 아니면 별에 쏘인 것일까? 

별에 쏘이다

처음엔 그저 농으로 해본 소리였다
영락없이 벌에 쏘인 자리처럼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올라
보는 이들마다 벌에 쏘였느냐 묻기에
벌이 아니라 별에 쏘인 거라고 
지리산 연하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어찌나 별이 곱고 좋던지
고개가 아플 정도로 별을 쳐다본 뒤로           
일이 이렇게 되었노라고  

얼음찜질 덕분인지
보기 흉하게 부어오른 눈두덩은
웬만큼 가라앉았다
이마와 가슴에 박힌 침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다시 태어나려는지
환하게 아프다

별에 쏘인 것이다. 

시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제목은 소설가이신 엄마가 잡아주셨단다. 소설을 시처럼 쓰는 분답게 아름다운 제목을 잡아주셨는데 실망이나 시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을 했었지. 언제 네 시평을 듣고 싶구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힘을 얻기를

 노고단으로 가는 계단에서 편지의 주인공인 지윤이가 엄마(이성아 소설가)와 예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고단으로 가는 계단에서 편지의 주인공인 지윤이가 엄마(이성아 소설가)와 예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준철

연하천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벽소령을 지나면서 딱 한번 위기가 왔었지. 다행히도 무릎관절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고 체력이 떨어진 것인데, 그래도 그 어려운 순간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이 네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그 후에도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 사람이 직업은 못 속인다고 내가 학교 선생이다 보니 대체로 학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만. 

"체력이 비슷하다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산을 잘 올라갈까?"
"그거야 당연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산을 더 잘 올라가겠지요."
"당연하지? 그래서 난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맞아요. 저도 좋아하는 과목은 아무리 공부해도 지겹지 않거든요."

"아까 계단을 오를 때는 한 계단만 생각하고 오르는 게 좋다고 했지?"
"정말 그래요. 맨 꼭대기를 보고 걸으면 마음부터 지쳐버리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을 준비한다는 말이 있어. 그러니 아이들이 얼마나 학교생활이 지겹고 재미가 없겠어. 한 계단 한 계단 즐겁게 오르다 보면 그 결과로 당연히 좋은 대학에도 갈 텐데 말이야. 미리부터 대학을 준비한다는 것은 맨 꼭대기를 보고 계단을 오른다는 거 아니야."

영혼의 고향인 자연에 오면 눈에 씌었던 것이 벗겨지면서 모든 것이 확실해진단다.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경쟁력 있는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학교에서 점수경쟁을 시키는 것이 곧 경쟁력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는 착각이 문제라고 생각해. 일제고사를 부활하여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은 곧 아이들의 창의력을 말살시키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는데, 창의력이 부족한 사람이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이 착각이라는 거지.

이건 상식인데 나라의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으니 너무도 마음이 답답해 나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닐까 싶구나. 넌 갓 대학에 입학한 초년생이니 지리산을 종주하며 몸으로 체득한 교훈들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산이 좋아지면서 힘을 얻었듯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기를 빈다.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가장 아쉬웠던 것은 너에게 천왕봉 일출을 보여주지 못한 거야. 날씨가 흐린 탓에 그렇게 되었지만, 그 대신 시원한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마치 신선이라도 된 기분으로 구름 속을 마냥 걸었던 꿈같은 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유장한 지리산 능선의 아름다움을 구경시켜 주지 못한 것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 또한 사랑의 힘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이겨나가리

 한국작가회의 순천지부 회원과 가족 9명이 처음으로 지난 8월 1일-3일(2박 3일)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연하천 산장에서 첫날 밤을 보낸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국작가회의 순천지부 회원과 가족 9명이 처음으로 지난 8월 1일-3일(2박 3일)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연하천 산장에서 첫날 밤을 보낸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준철

새벽같이 일어나 경황 없이 천왕봉에 오르느라 사진기를 챙겨오지 못해 너의 첫 지리산 종주 기념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네 이마와 가슴 속에 별처럼 박혀 있을 지리산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끔씩 꺼내보면 될 일이니 그런 마음은 접어두기로 한다.

고맙구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게 해주어서. 나 또한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이겨나가려고 한다. 건강하길 빈다.
#지리산 종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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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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