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철학자 물을 품고 낯선 산길을 걷다

'강경구전' 갤러리학고재에서 8월 2일까지

등록 2008.07.31 11:05수정 2008.07.3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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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갤러리학고재 본관 입구와 강경구전 포스터

갤러리학고재 본관 입구와 강경구전 포스터 ⓒ 김형순


90년대부터 서울별곡연작으로 인왕산, 북한산, 세검정, 한강, 동숭동, 흑석동 등을 그려온 중견화가 강경구(1952~) 전이 8월 2일까지 갤러리학고재(대표 우찬규) 본관에서 열린다.

그의 그림 이력은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글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서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한, 낙산, 인왕, 관악, 도봉, 수락산 등을 특유의 힘차고 두텁게 중첩된 붓질과 강하고 둔중한 힘으로 차오르는 구성 및 겹쳐지면서 밀고 올라오는 색채의 궤적으로 담아왔는데 산뿐만 아니라 한강, 밀집된 아파트 그리고 구체적인 서울의 동네풍경 등도 그려왔다."

작가는 이렇게 그만의 집념과 열정을 가지고 서울과 그 주변의 산과 사람과 풍경을 소재로 작업해왔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미적 정체성이 보인다. 힘차고 거칠게 중첩된 붓질은 한국인의 뭔가 억눌린 듯한 정서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 같다.

이번 전에는 산 그림과 함께 특이하게 물에서 노는 소년이 등장한다. 갑자기 웬 소년일까? 작가도 그렇겠지만 소년이란 모든 성인남자 속에 숨겨진 영원한 이상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지금 물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그 이유는 뭘까?

하나, 소년은 강에서 시체를 보았다

a  '허튼 날개 짓(왼쪽)' '썰물(가운데)' '먼 그림자(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12×162cm 2008

'허튼 날개 짓(왼쪽)' '썰물(가운데)' '먼 그림자(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12×162cm 2008 ⓒ 김형순


위 작품의 주인공은 소년이다. 제목은 '허튼 날갯짓, 썰물, 먼 그림자'이다. 소년은 물새처럼 허공에 날갯짓을 하며 썰물에 길게 어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불안과 동요가 흐르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은 작가는 인도에 갔다가 갠지스 강에서 우연히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강물에 떠다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데서 유래한다. 작가의 분신인 이 소년은 바로 지금 그 낯선 문제, 즉 죽음을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해남에 가면 논 한가운데 무덤이 그대로 있어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한다. 인도의 강도 그런 모양이다. 사실 어떤 때는 어디까지가 삶이고 죽음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하지만 둘을 꼭 경계 지울 필요가 있을까. 우리 주변에서 살아있으나 죽어있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물 속에서 생사를 묻는 소년철학자

a  '한낮'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91×65cm 2008

'한낮'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91×65cm 2008 ⓒ 김형순


'한낮'이라는 작품 속 소년은 위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가 클로즈업되면서 그의 고민도 더 커 보인다. 마치 깊은 상념에 빠져 삶에 대한 어른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어린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소년은 갑자기 이 난제를 풀려다보니 힘든 모양이다. 그 표정이 편치 않다.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기에 비친 모습이 자기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보다.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를 다시 묻는 것 같다.

하긴 하얀 살갗이 푸른 물과 닿을 때 느끼는 쾌감은 클 것이다. 어머니 품 같은 물길과 교합하는 일은 남녀의 합일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전과 다르게 그 부드러운 물결 속에도 치명적인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헤아린다.   

낯선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a  '낯선 여름'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259×194cm 2008

'낯선 여름'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259×194cm 2008 ⓒ 김형순


'낯선 여름', 제목이 암시하듯 갑자기 소년에게 모든 것이 이방인처럼 낯설게 보이나보다. 낯설게 본다는 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그는 삶과 죽음,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또 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또 사람들이 왜 이리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그리고 왜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지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는 것 같다. 하긴 이런 뜻밖의 질문은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아니면 삶의 소중함을 진정 깨닫는 계기도 될 것이다.

소년이 이 정도 고민을 했다면 이제 그도 삶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이 소년의 고민 뒤에 작가가 있고 그의 고민이 여기 그림 속에 다 담겨져 있는 것이다.

둘, 겸재가 그린 산수의 원형을 찾아서

a  '신기루'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2008

'신기루'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2008 ⓒ 김형순


이번에는 그의 산수화를 보자. 그가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왔다. 그는 현재 대학교수지만 10년간 관송미술관에서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연구자이기도 했다. 겸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셈이다. 현장답사로 얻은 경험과 감흥을 감동적으로 구현한 겸재의 회화정신을 따르려 한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이 머리글에서 기술한 강경구의 겸재정신 이어가기의 골자는 이렇다.

"강경구는 겸재의 <인왕제색도>을 보고 이를 영감의 산으로 삼는다. 그래서 인왕산을 수없이 드나든다. 그는 조선실경을 주체적으로 형상화한 겸재야말로 한국화의 원류로 본다. 그리고 겸재처럼 실패가 오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투신한다. 겸재의 적묵(積墨, 진한 먹빛으로 덧칠하는 필법) 등도 과감히 구사한다." 

이 작품도 바위의 중첩된 진한 먹빛이 겸재의 적묵 풍이다. '신기루'라는 제목도 멋지다. 산은 조물주가 만든 신기루가 아닌가. 사실 이 세상에 이렇게 멋진 조형물도 흔치 않다. 산수화가 이리도 정겹고 흥겨운 건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구조를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 산이 주는 깊은 맛

a  '12월' 캔버스에 아크릴 259×194cm 2008

'12월' 캔버스에 아크릴 259×194cm 2008 ⓒ 김형순


이 작품제목은 '12월', 산은 가을이나 봄, 여름도 좋지만 겨울이 또한 좋으리라. 겨울 산은 거칠지만 초탈하고 담백하여 조용히 사람들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아 깊은 맛이 난다. 그런 맛을 알려면 산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때로 발길이 끊어져 적막해 보이는 겨울 산, 거기에는 어떤 고독과 침묵도 흐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산이 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중생의 백팔번뇌를 다 듣고 본다는 관음보살의 경지에도 가지 않을까 싶다. 또한 산의 인내심도 배우게 된다.

인생이나 예술은 물론 때로 사업에서도 최고의 미덕은 인내하는 것 아닌가 싶다. 산은 인내의 천재로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중량감이 있어 보인다. 때로는 호랑이의 위용도 연상된다. 우리는 이런 자연 앞에 서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욕심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살기

a  '나한(羅漢)'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 2008

'나한(羅漢)'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 2008 ⓒ 김형순


'나한(羅漢)'은 불교용어로 중생의 애환을 보듬고 쓰다듬는 부처의 제자들을 뜻한다. 욕심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살면 그게 나한이다. 위에 바위산그림도 마치 오랫동안 수행과 공덕을 쌓으며 수도해온 나한처럼 보인다.

산의 정상을 오른 사람은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법,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바로 나한의 삶이고 바로 이 그림의 주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를 그냥 산수화가 아니라 우주와 인생의 뜻이 담긴 산수화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고, 그런 혼연일체 속에서 우리가 바로 나한이 되고, 우리가 이 땅에 소담스럽게 한 송이의 연꽃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싶다.

'천 개의 바람'을 안고 사는 태곳적 세상

a  '천 개의 바람' 캔버스에 아크릴 194×518cm 2008

'천 개의 바람' 캔버스에 아크릴 194×518cm 2008 ⓒ 김형순


끝으로 '천 개의 바람'을 보니 하늘이 처음 열린 태곳적 세상에서 불어오는 산의 기운과 신령한 바람을 여기에 다 모아놓은 것 같다. 그런 것이 아직도 살아 있기에 우리가 겪는 애달픔이나 고단함도 덜어주고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싶다.

이런 그림을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산수화라고 하면 어떨까싶다. 보이지 않는 것도 듣고 들리지 않는 것도 보는 그래서 그 본질을 추구하는 산수화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땅의 산이 되고 물이 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여간 이런 산 그림에 목숨을 건 작가 강경구, 그는 오늘도 겸재가 추구했던 높은 경지의 예술성을 견지하면서 오랜 친구 같은 서울 근교의 산과 인물과 풍경 등을 풍부한 감성과 원숙미 넘치는 그만의 독특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화랑소개: 학고재(본관)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전화 02)739-4937 www.hakgojae.com
작가소개: 강경구(姜敬求 1952~)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경원대미대교수
홈페이지 http://www.kcaf.or.kr/art500/kangkyungkoo <수상> 이중섭 미술상(2000)
개인전: 금호미술관(2000), 동산방화랑(1998), 금호갤러리(1994), 송원화랑(1993), 토아트스페이스, 갤러리포럼(1992)
금호미술관(1991), 토갤러리(1989), 백악미술관(1987)
갤러리학고재 신관에서는 '김호득전'도 같이 열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화랑소개: 학고재(본관)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전화 02)739-4937 www.hakgojae.com
작가소개: 강경구(姜敬求 1952~)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경원대미대교수
홈페이지 http://www.kcaf.or.kr/art500/kangkyungkoo <수상> 이중섭 미술상(2000)
개인전: 금호미술관(2000), 동산방화랑(1998), 금호갤러리(1994), 송원화랑(1993), 토아트스페이스, 갤러리포럼(1992)
금호미술관(1991), 토갤러리(1989), 백악미술관(1987)
갤러리학고재 신관에서는 '김호득전'도 같이 열리고 있다
#강경구 #겸재 #이주헌 #박영택 #나한(羅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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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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