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7일 참여연대 지하 회의실에서는 '전의경 폐지를 위한 연대' 결성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면 기자들이 많이 참석했던 것 같지는 않다. 듬성듬성 앉은 모습의 기자회견장이 왠지 썰렁해 보인다.
뒤늦게 살펴본 그날의 기자회견장 사진과 관련 기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이날 전의경 폐지 연대 결성식에 6개 시민단체와 뜻을 같이 한 한홍구 교수, 임종인 전 국회의원과 함께 박석진씨가 있었다. 그는 17년 전에 전의경으로 근무하다가 헌법소원을 냈던 이다.
역사는 이렇게 되풀이 되고 있었다.
17년 전 군복무를 위해 입대한 한 젊은이는 국방의 의무 대신 경찰의 시위진압 맨 앞에 배치돼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가 경찰(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전의경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국방의 의무 대신 경찰의 시위 진압을 대신 시키는 전의경 제도는 위헌이라는 주장이었다. 헌법재판소는 92년 그러나 5대 4의 다수 의견으로 전의경 제도를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로부터 17년 후 2008년 6월 서울경찰청 제4기동대 이아무개 상경이 육군으로의 전환 복무를 요구했다. 촛불집회와 시위를 진압하는 전의경으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군과 경찰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전의경 폐지 연대의 결성 계기가 됐다.
이아무개 상경의 전환복무 신청 한 달도 안 돼 이번에는 서울 중랑경찰서 소속 이길준 이경이 시민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진압토록 하고 있는 부당한 진압명령에 따를 수 없다며 양심선언하고 귀대를 거부했다. 전의경 제도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 때까지 귀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양심과 달리 시민들을 진압해야 할 적대적 존재로 규정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마치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국방의무 대신 시민들을 상대로 시위를 진압하는 데 동원하는 전의경 제도는 그 자체가 위헌적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국토방위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빛나는 젊음을 저당 잡힌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친구이자 형·동생이고, 누이이자 어머니·아버지인 시민들을 방패로 막고, 진압봉을 휘둘러 가면서 진압하는 일을 시킬 수는 없다.
국방의무는 가족과 친구들을 적의 침략이나 공격으로부터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되레 가족과 친구들을 막고 진압하는 일이 국방의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수는 없다. 평소 국방의무의 신성함을 그렇게 강조하는 군이 어떻게 이런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의문이다.
새삼 지난 17년 동안 젊은이들의 인권과 영혼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둔감했던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전·의경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을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했던 정권은 굳이 거론할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할 점은 이른바 민주정권이 집권했다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젊은이들의 영혼과 인권을 여지없이 유린하는 전의경 제도가 그대로 존속됐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들 정권은, 그 위정자들은 무엇을 해왔던 것인지, 그 때 '우리'는 또 무엇을 해왔던 것인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전의경제도 폐지가 검토되기는 했다. 복무기한 단축 등에 따른 병역 자원 확보 차원에서 노무현 정권 때 2012년까지 전의경제도를 폐지하는 방안이 마련되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안정적인 병역 자원 확보라는, 군 병력 차원의 편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의경제도의 위헌적인 측면이나 젊은 장병들의 인권이나 영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나마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때부터 폐지 방침의 재고를 천명했고, 실제 폐지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젊은이에게 '폭력적 상흔' 남기는 제도 없애야
누군가는 전의경 가운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들 전의경들의 '인권'이나 '영혼'을 운위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지난 17년 동안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3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실제 지난 10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전의경들이 시민들과 직접 대치하거나 충돌할 일이 비교적 적었다. 그동안 전의경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의경들은 다시 시위 진압의 선봉대 역할을 맡게 됐다. 시위 진압에 동원된 젊은 장병들이 겪는 시민들과의 충돌 경험은 두고두고 '건강한 시민'으로 생활하는 데 장애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다.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패고, 방패로 찍어본 음습한 경험은 그들의 영혼과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폭력적 상흔'으로 남기 십상이다.
이들 젊은 장병들에게 국가와 시민사회를 위한 의무 이행에 따른 자랑스러운 자부심을 심어주기는커녕 두고두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야수와 같은 어두운 폭력성을 그 상흔으로 남길 수 있는 제도는 지금 당장 폐지돼야 마땅할 것이다. 적어도 그런 폭력적 제도에 대한 이들 전의경들의 '거부선언'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귀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에게 부과된 '국방의 의무'를 해태하거나 거부하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젊은이들의 호소를 거부하거나 외면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28일 <조선일보>를 비롯해 상당수 신문들은 이들의 절박한 호소를 아예 외면하거나 거의 무시했다.
2008.07.28 15:0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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