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어머니와 음력 초사흘

우리의 전통문화를 짓밟았던 박정희

등록 2008.09.03 09:56수정 2008.09.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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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는 보릿짚과 산야초를 혼합해 퇴비를 만들고, 피사리와 참깨수확이 한창인데요. 9월 위기설과 치솟는 물가에도 농민들은 대풍작을 예상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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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고 대문 앞에서 바라본 들녘. 본래는 고사(告祀)도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지냈다고 하는군요.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심란했던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 조종안

비가 그치고 대문 앞에서 바라본 들녘. 본래는 고사(告祀)도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지냈다고 하는군요.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심란했던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 조종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8월에는 양력과 음력이 사이좋게 함께 갔는데, 오곡이 영글기 시작하는 9월은 음력이 하루 빠르게 가는군요. 양력은 큰 달이 31일이고 작은 달이 30일인데 반해 음력은 큰 달이 30일이고 작은 달은 29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이지요.

 

매월 음력 초사흘은 고사 지내는 날

 

음력이 하루 빠른 9월의 2일은 음력으로 팔월 초사흘이었습니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월 초사흘이 되면 단골 식객이면서 음식 솜씨가 좋았던 '난순이네 엄니'를 데리러 다녔고, 이튿날에는 떡 심부름하러 다니느라 바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있던 '양키시장'에서 새 교복을 맞춰 입고, 송편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추석이 가까워지는 이유도 있겠지만, 매월 음력 초사흘마다 고사(告祀)를 지냈기 때문에 떡과 삶은 돼지고기 등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었거든요. 초저녁부터 손님들이 안방에서 피우는 이야기꽃은 사람을 좋아하는 저에게 더없는 즐거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째보선창'에서 뱃사람들을 상대로 쌀가게를 했던 어머니는 음력으로 매월 초사흘마다 고사를 지냈는데요. 풍어제를 자주 지내고 무사 귀환을 기원하느라 고사를 잘 지냈던 뱃사람들의 생활습관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고사를 지내는 날에는 어른 가슴통만 한 시루를 가마솥에 얹혀놓고 떡을 쪘는데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마솥과 시루가 맞닿는 부분에 시루 번을 잘못 발라 떡이 설익기라도 하면 그날 고사를 망치거든요.

 

떡시루와 삶은 돼지고기 외에도 과일과 정화수를 떠놓고 고사를 지냈는데, 어머니는 대문과 마당의 터주신, 부엌의 조왕신, 샘가, 장독대, 곳간, 대청, 뒷간 등을 관리하는 신(神)을 찾아다니며 두 손을 모으고 소망을 빌었습니다. 겨우 육십갑자를 꼽으며 무당 보조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빨빠진쟁이 할머니'와 해망동에 사는 '해망동 할머니'가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상을 안방으로 들여와 성주님께 소원을 비는 것으로 고사가 끝납니다. 그러면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다리던 손님들이 떡과 돼지고기를 시식했는데요. 매월 음력 초사흘은 고기 맛을 잊고 살던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고사를 실용적으로 지냈던 어머니

 

고사를 지내기 전에 부정한 일을 봐서는 안 되며, 집안을 정갈하게 하고 몸가짐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시던 어머니는 고사를 지내는 전날에 누님과 함께 목욕탕에 다녀오셨습니다.   

 

문헌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고사를 지내는 날에는 대문에 금줄을 달아 외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을 오라고 해서 떡과 돼지고기를 대접했던 어머니를 보면 고사도 현실에 맞게 실용적으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경을 읽고 고사를 지내면서도 무당이 칼을 들고 춤을 추며 신(神)을 부르는 굿은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왜 굿은 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더니 정성으로 복을 비는 것이야 괜찮지만, 굿은 절차가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싫어했다고 하더라고요. 

 

고사의 본행사였던 독경(讀經)

 

대보름과 설날이 들어 있는 정월에는 초사흘 고사를 지내지 않고 '총각 점쟁이'가 잡아주는 날에 독경(讀經)을 했는데요. 지난해와 새롭게 맞이할 1년을 총정리 하는 본행사로 표현하는 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독경하는 날이 잡히면 중동 갯벌 근처 '큰 동네'에 사는 경 읽는 '뚝발이 양반'에게 소식을 전하러 다녔는데요. 작두로 잘게 자른 짚을 개흙에 버무려 만든 갈라진 담과 벽이 가난뱅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뚝발이 양반이 장구와 꽹과리를 쳐가며 경을 읽으면 해망동 할머니는 옆에서 징을 두드리며 흥을 돋웠습니다. 뚝발이 양반이 읽는 독경은 인간문화재의 열창을, 징을 두드리는 해망동 할머니는 고수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열정이 넘치던 당시 모습들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지금도 의심되는 게 하나 있는데요. 경을 읽는 사람은 항상 근심과 걱정, 병이나 고통이 없으며 안색이 깨끗하고 가난하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뚝발이 양반은 가난뱅이에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습니다. 또 이빨빠진쟁이 할머니와 해망동 할머니는 어머니도 안타까워하실 정도로 가난했고 아들들이 속을 썩였으니 효과가 얼마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전통문화를 짓밟았던 독재자 박정희

 

민간신앙이자 무속의식의 하나인 고사는 우리 민족 고유의 풍속이자 전통문화입니다. 집안이 재액을 당하지 않고, 행운이 계속되도록 신에게 기원하는 일종의 제사이기도 한데요. 선사시대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무속은 국가적인 행사는 물론 일반 평민들도 무당을 신성시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무속인들의 신분이 천민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강점기에는 더욱 강한 탄압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속이 우리 민족을 하나로 연결하는 구심점이자 민족성의 결정체였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문화를 반공의 하위 개념으로 두고 권력연장에 이용했던 박정희 역시 무속을 미신이라며 탄압을 가했지요.

 

반공과 유신헌법에 기여하는 문화 외에는 통제와 탄압을 가했던 박정희 독재정권은 결국 무속인들을 잡아들이면서 전통문화를 짓밟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저희 집에서 경을 읽고 주문을 외우던 분들 모두가 무사했던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씁쓸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안부를 알고 있던 뚝발이 양반과 이빨빠진쟁이 할머니, 그리고 해망동 할머니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호기심을 갖고 그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던 제가 명복을 빌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음력 초사흘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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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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