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커가는데, 언제 제대로 취직하나

[나의 좌충우돌 구직기①] 낙향 10년 동안 10번 넘게 직장 옮긴 사연

등록 2008.09.08 10:42수정 2008.09.0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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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 고향 풍경 고향에 내려온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내 고향 풍경 고향에 내려온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 이종찬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일은
혼자 있을 때
몸이 아픈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이 나는 때는
저희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맛난 음식을 남김없이 먹을 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습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축 처진 어깨로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지지리도 못난 그대가
나를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이다 

-이소리, '삶' 모두

지난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슴 쓰린 기억이든 아름다운 추억이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게 서러운 상처, 그 상처가 지금까지도 흉터로 남아 가끔 덧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은 아프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은 아프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아니다. 삶은 한 번 크게 아프고 나면 좀처럼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회복하려고 하면 세상은 저만치 또 달아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의 좌충우돌 구직기'란 낱말을 보는 순간 왠지 눈가가 찡해지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10여 년 전 내가 서울에서 '고향 앞으로' 내려간 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울산·마산 창원·부산·경주·김해·순천 등지를 떠돌며 힘겹게 살아온 삶을 압축한 낱말 같았서다.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취직과 실직을 10번 넘게 거듭하면서 의식주를 위해 매달린 내 삶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울다가 웃다가'가 끝없이 이어졌다. 어쩌다 취직을 하면 한창 아양을 떠는 예쁜 두 딸이, 실직하면 실망에 가득 찬 아내가 눈앞에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1996년 가을부터 낙엽처럼 뒹굴기 시작한 나날들

"접니다."
"그래, 어찌 됐냐?"
"돈 있으면 50만원만 좀 빌려주십시오. 이사비가 없어서…."
"내 참! 기가 막혀서. 명색이 사업을 한다는 넘이 이사비도 남겨놓지 않고 빚 갚는 데 다 썼단 말이냐? 그러니 사업이 망할 수밖에. 일단 알았다."

취직에 따른 나의 방황은 1996년 가을부터 시작됐다. 그 때 큰딸(6)은 집(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가까운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고, 작은딸(4)은 한창 재롱을 피웠다. 사람들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라며 한창 단풍놀이를 즐기고 있었지만 내 마음에는 땡겨울 칼바람만 쌩하게 불었다.

내가 3년 동안 힘겹게 꾸리고 있던 출판사가 크게 기울어 급기야 집과 장롱 등에 빨간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거래처 여기저기서 빚 독촉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출판사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이 없었다. 출판가에서 '단군 이래 최고 불황'이라는 말이 떠돌다 보니, 평소 출판에 관심 있던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빈털터리로 낙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든 서울에서 살아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해 12월 끝자락, 나는 아직 경매가 진행 중인 아파트에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둔 채 이불 보따리와 살림도구 몇 개 1톤 트럭에 싣고 고향인 창원으로 내려갔다.

싸락눈마저 흩날리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몇 번이나 서울 쪽 하늘을 뒤돌아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10여 년을 넘게 살아온 서울에서 이렇게 처량한 모습으로 쫓겨나야 하다니. 트럭 운전기사도 내가 마음에 쓰였던지 몇 번이나 휴게소에서 쉬었다. 그렇게 고향 창원에 도착한 나는 우선 처갓집 창고와 큰형 댁 창고에 짐을 나눠 풀었다.        

a 큰딸  낙향할 때 6살이었던 큰딸이 어느새 고2가 되었다

큰딸 낙향할 때 6살이었던 큰딸이 어느새 고2가 되었다 ⓒ 이종찬


"소낙비 피한다는 셈치고 다녀보는 게 어때?"

"내가 먹고 살 자리 하나 없을까?"
"글쟁이가 지방에 내려와 봤자 할 게 뭐가 있겠어. 언론사에나 들어가지. 울산에 막 창간한 일간지가 하나 있거든. 그 신문사 문화부 데스크 자리 하나 알아볼까?"
"좋지. 근데 잠은 어디서 자지?"
"우리집에서 해결하면 돼. 그나저나 월급이 좀 적어서 말이야. 당분간 소낙비 피한다는 셈치고 다녀보는 게 어때?"

고향에 내려온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먹고 자는 것은 우선 처갓집에서 해결했다. 그때 양산시 웅상읍에 살고 있었던 이적(민통선교회 목사) 시인이 울산에 있는 일간지 문화부 자리를 소개했다. 월급은 좀 적었지만 우선 매달 일정한 금액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던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1997년 1월초. 나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고, 그해 1월13일자로 문화부 데스크로 사령이 났다. 1월12일, 간단한 세면도구만 챙겨들고 창원에서 울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탄 나는 마음을 꼭꼭 다졌다. 낙향하던 날, '꼴 좋다'라고 말하던 형님의 빈정거림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지만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란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 때부터 나는 맡은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방 일간지란 게 워낙 재정과 인력이 열악하다 보니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대판 16면 중 4면을 차지하는 문화면을 책임지면서 '데스크칼럼'과 장편소설도 써야 했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 잠시 사회부 데스크를 맡기도 했다. 불평을 토로할 틈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렇게 3개월이 흘러가자 나름대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서울에 살던 아내와 두 딸도 살림을 정리하고 창원으로 내려왔다. 문화부 수습기자도 한 명 들어왔고, 울산광역시 출범준비위원회 위원도 맡았다. 이대로 간다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사실, 그때 나는 1년 계획으로 낙향했다.

일간지 문화부장에서 '스님 아닌 스님' 되다

하지만 서울에서 진 빚이 늘 발목을 잡곤 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해 겨울로 접어들면서 IMF가 터졌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정적으로 나오던 기업체 일간지 광고도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잘 나오던 월급이 한 달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1998년 3월이 되자 아예 3~4개월씩 밀리는 게 예사였다.

IMF가 내민 칼날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급기야 내가 다니던 일간지에서도 데스크 이상 간부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월급을 50% 이상 자진반납하자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나는 심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되면 4개월 밀린 월급이 2개월 치로 줄어드는 데다 그나마 그 2개월 치 월급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끝까지 반대하자 회사에서는 나를 광고부장으로 발령냈다. 내가 편집국 기자를 광고국으로 발령낸 것은 명백한 인사 잘못이라며 거칠게 항의하자 회사에서는 온갖 악성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정말 다행스럽게도 대구에 있는 절에서 불교 경전을 해제하는 일과 월보 만드는 일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절은 내가 미륵불 조성 행사에 따른 기사를 써주면서 인연을 맺고 있던 곳이었다. 올커니 싶었다. 나는 4월초부터 그 절에서 일하기로 하고, 3월말에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그때부터 나는 '스님 아닌 스님'이 되어 불경을 해제하여 불자들에게 강연을 하고, 절과 불자들의 움직임을 회보에 꼼꼼하게 실었다.

<주역>과 <천부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경전을 공부한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2년 남짓 '절밥'을 먹을 때에도 서울에서 진 빚, 그때까지도 갚지 못한 빚은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발목을 붙잡곤 했다. 2년 뒤, 엉뚱한 일이 터져 '절밥'을 먹지 못하게 된 것도, 내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 지독한 빚쟁이 때문이었다.

그 일을 그만 둔 나는 한동안 신문을 뒤적이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1999년 7월, 나는 김해에서 창간준비를 하고 있던 일간지 문화부 데스크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 달 보름 동안 열심히 창간준비를 한 끝에 창간호가 나오던 날, 사직서도 없이 그만둬야 했다.

처음 얼굴을 마주 한 사장의 번지르르한 말과는 달리 신문사 재정은 첫 월급조차 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게다가 처음 한 약속과도 많이 달랐다. 사장은 내게 문화부 기자를 2~3명 정도 붙여 주겠다고 했지만 한 명도 뽑지 않았다. 칼럼니스트를 뽑아 원고를 쓰게 하면 원고료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마저 지키지 않았다. 

a 작은딸  가수가 꿈인 작은딸

작은딸 가수가 꿈인 작은딸 ⓒ 이종찬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애들도 자꾸만 커 가는데..."

그 신문사를 그만 둔 나는 어렵게 구한 전문 칼럼니스트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했다.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직장을 구할 생각을 않고, 절에서 겪었던 일을 주춧돌로 삼아 장편소설 집필에만 매달렸다. '장편소설로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5월에 나온 책이 <미륵딸>이었다. 하지만 선 인세를 받고 낸 그 책도 생각처럼 팔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얼 해야 두 딸과 아내를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을까. 아니, 행복은 아니더라도 두 딸 교육비와 생활비, 세금 걱정이라도 하지 않고 살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세상은 어찌 생겨 먹었기에 부자는 더욱 잘 살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 세상을 원망했다. 내가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지내자 하루는 아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남들은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었다느니 하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잖아. 애들도 자꾸만 커 가는데"라는 말을 툭 던졌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2001년 3월, 나는 다시 울산으로 갔다. '시민의 시민을 위한 시민의 신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일간지를 만들자고 뜻 맞는 사람들에게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집행위원장을 맡아 새 신문 창간을 위해 그야말로 '발 벗고' 뛰었다. 언론사 창간에 뜻을 둔 기업인들도 만났고, 재력 있는 사람들도 꽤 만났다.

일간지 창간 집행위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신문사 사무실도 차리고 마침내 창간준비호도 냈다. 하지만 일간지 창간은 그리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발목을 잡는 것은 재정이었다. 개미주주들인 시민주로 엄청난 자금을 만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과 같았다. 그해 겨울, 나는 전기와 전화마저 끊긴 사무실에서 며칠 밤을 보낸 뒤 맥없이 창원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세상과 나 사이에 막걸리를 둔 지리한 싸움이 또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취직과 실직의 끝은 어디쯤일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일한 대가만큼 돌아오지 않는 세상. 툭 하면 나를 등지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  그래서 나는 세상과 싸운다. 그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좌충우돌 구직기' 응모글.


덧붙이는 글 '나의 좌충우돌 구직기' 응모글.
#낙향 #나의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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