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54) 빵굼터

[우리 말에 마음쓰기 426] ‘산 고기-산 물고기’와 ‘활어’

등록 2008.09.19 15:21수정 2008.09.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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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빵굼터

 

 인천에서만 살다가 서울로 나와서 시내를 돌아다니게 된 때는 1994년. 이때부터 서울 시내에 있는 헌책방도 한 곳 두 곳 찾아가 보았고, 웬만한 동네마다, 또 강웃마을 오래된 골목길 안쪽마다 헌책방이 깃든 모습을 보면서, 서울은 참 책이 많은 곳이라고 느끼며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헌책방도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서울 시내버스도 처음으로 타고 돌아다녀 보면서, 낯선 거리 낯선 가게 낯선 사람을 부대끼던 어느 날, 청파동 숙명여대역 둘레를 지나다가, 그때까지 보지 못한 가게이름 하나 만납니다.

 

 ― 빵굼터

 

 인천에도 빵집이 있지만, 인천에서 늘 보아 오던 빵집은 독일제과, 뉴욕제과, 파리제과 따위였지, 토박이말로 ‘빵집’을 쓰는 곳도, 또 ‘빵굼터’처럼 살뜰히 빚어낸 이름으로 된 곳도 없었습니다.

 

 ― 빵 + 굽다 + 터 = 빵을 굽는 터 = 빵굼터

 

 처음에는 청파동에만 있는 빵집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빵굼터’라는 이름을 똑같이 내걸고 있는 숱한 빵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다섯 해 여섯 해, 열 해 주욱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빵굼터’ 비슷하게 짓는 빵집 이름도 만납니다.

 

 ┌ 빵 굽는 마을

 ├ 빵굽는 작은 마을

 ├ 오늘도 빵굽네

 ├ 빵이 있는 …

 └ …

 

 곰곰이 돌아보니, ‘빵굼터’라는 가게이름을 보던 무렵, 다른 가게들은 ‘크라운 베이커리’니 ‘파리 크라상’이니 하고 이름을 바꾸던 때였고, 그 뒤로 오늘날까지 ‘뚜레쥬르’니 ‘파리바게트’니 하는 이름으로 또 바꿉니다.

 

 빵집 임자가 제 이름을 내걸고 빵집을 꾸려 나가도, ‘아무개 빵집’으로 이름을 붙이는 일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고, ‘아무개 베이커리’라는 이름만 손쉽게 찾아보게 됩니다.

 

 빵이라는 먹을거리는 우리 손으로 빚어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나라밖에서 들어온 먹을거리 문화이기 때문인가요. 이제는(또 예전에도) ‘세계화 시대’라고 하면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 금이 없다고 하면서, 나라밖에서 들여오는 물건을 굳이 서양 이름으로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빵을 배웠으니 프랑스말로 빵집 이름을 붙이고, 빵집에서 선보이는 빵들한테도 프랑스 이름을 붙여야 하나요. 독일에서 빵을 익혔으니 독일말로 빵집 이름을 붙이고, 빵집에서 내놓는 빵한테 붙이는 이름도 독일말이어야 하나요.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 들여오는 ‘라면 문화’는 온통 일본말로 되어 있습니다. 라면집 짜임새도 꾸밈새도 일본 느낌이 나도록 합니다. 여러 가지 라면 이름도 일본말로 되어 있고, 아예 일본글로 적어 놓기까지 하며, 가게 간판도 일본글이 큼직하게 적혀 있곤 합니다.

 

 어쩌면, 우리 먹을거리가 나라밖으로 팔려 나간다고 할 때에도, 그 나라밖 사람들은 한글을 큼직하게 써 놓으면서 ‘한국에서 온 먹을거리’라고 내세울 수 있겠군요. 우리가 하듯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빵 문화는 나라밖 문화라고 하기에는 우리 삶터 깊숙한 데까지 들어와 있지 않는가 싶어요. ‘빵’을 바깥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빵집은 ‘빵집’이고, 빵가게는 ‘빵가게’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 나름대로, 우리한테 걸맞도록, 우리 슬기로 새로 꽃피우거나 가다듬는 빵 문화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ㄴ. 산고기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다 보면, 또 시내버스를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창밖으로 돌아갑니다. 창밖에 어떤 모습이 펼쳐지나 궁금하고, 늘 지나다니는 길이라 해도, 미처 몰랐던 새 헌책방이 문을 열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자꾸 내다보게 됩니다.

 

 이렇게 내다보는 동안, 가게 간판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여러 가게 간판을 보면서 가게이름 붙이는 매무새를 느끼게 됩니다.

 

 ― 활어회직판장

 

 어느 날이었나, 똑같은 가게가 퍽 길게 늘어서 있는 데를 지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펼쳐진 가게마다 ‘활어회직판장’이라는 큰 글씨를 적어 놓고 있더군요. ‘활어’, ‘활어’, ‘활어’가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잘 떠오르지 않아서 집에 가서 국어사전을 뒤적여 보기로 합니다. 꽤 자주 듣는 말이지만, 어떤 물고기를 가리키는가는 뚜렷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 활어(活魚) : 살아 있는 물고기. ‘산 고기’, ‘산 물고기’로 순화

 └ 산고기 / 산 고기

 

 ‘산’이라고 할 때에는 ‘뫼’를 뜻하는 ‘산’이 있고 ‘염산’을 가리키는 ‘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산고기’라 하면 “산에 사는 짐승 고기”를 가리킨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산고기 (1) 살아 있는 물고기

 └ 산고기 (2) 산에 사는 짐승 고기

 

 어쩌면, 두 가지가 헷갈릴 수 있으니 ‘산고기’라 안 하고 ‘활어’라 이름을 붙였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한글로만 적으니 알아듣지 못하겠다면서 ‘활어’라는 이름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예 ‘산고기’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쓴다면, 그래서 살아 있는 물고기도 ‘산고기’요, 산에 사는 짐승을 잡아서 익힌 고기도 ‘산고기’라 한다면 어떨는지요. 글자로는 같지만, 입으로 말할 때에는 달리 말할 ‘산고기’ 두 가지일 테며,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으면,

 

 ― 산 물고기

 

 ‘산 물고기’라고 적어 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09.19 15:21ⓒ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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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쓰기 #한글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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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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