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인자 영감만 있으면 되겠네"

[참가기] 세월의 풍상이 쌓인 조손 가정 도배 봉사활동

등록 2008.09.30 14:19수정 2008.09.3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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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어. 요것도 어떤 사람들이 달아주고, 전기도 고쳐주었는데, 이렇게 도배까지 했으니, 아이고 인자 영감만 있으면 되겠네."


할머니 얼굴이 밝다. 도배를 시작할 때의 걱정스런 표정이 아니다. 종일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맴돌던 할머니가 정리가 거의 끝나자 웃음 띤 얼굴로 혼자말처럼 하신 말씀이다. 간경화를 앓고 계시는 할머니는 얼굴에 핏기가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하신다. 쉬시라고 해도 한사코 주위를 맴도시는 할머니는 가구를 옮길 때마다 수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며 먼지들이 조금은 부끄러우신 듯하다.

개학하면서 선생님들로 구성된 나누리교사봉사단(단장 고연석, 순천제일고)에서는 독거노인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시내 복지관에서 추천한 할머니댁 집정리와 도배 봉사를 결정하였다. 사전 답사 후, 도배 자원봉사자로 나선 도배업자와 소요물품 견적을 내고, 벽지, 장판 등을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집정리에 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건장한 학생 자원 봉사자를 모집했다. 다행히 순천공고 학생 세명이 지원해 주었다. 집안이 좁아 많은 사람이 욺직일 수 없기에 남교사 3명과 도배업자 한분을 합하여 총 7명이 참여하였다. 오늘(9월 27일)이 그날이다.

할머니 집은 이제 갓 조성된 광양만 공단 옆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축사에서 새어나온 냄새가 상당히 역겹게 느껴지는 곳이어서 파리와 모기가 많았다. 좁은 골목을 20여m 지나면 해당화 두송이가 대문 위에 피어있는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주변에서 주워온 폐건축 잡목들이 화목 보일러 주변에 가득 쌓여있고, 시커먼 그을음 가득한 손가락만한 각목과 합판으로 만든 천정이 보인다.

두어 사람이 움직이기도 좁게 보이는 마당 한 켠에는 몇 개의 화분이 있다. 할머니와 손자가 기거하는 집과 창고와 세탁실로 쓰이는 건물, 그리고 오래된 작은 기와집이 삼각형으로 배치된 모습은 옹색하기 그지없다. 시골마을 힘든 삶의 모습을 가득 담은 모습이다.

a  할머니 집 대문 위에는 꽃이 피었다.

할머니 집 대문 위에는 꽃이 피었다. ⓒ 김치민


a  거실로 이어진 간이 지붕, 비가 샌다.

거실로 이어진 간이 지붕, 비가 샌다. ⓒ 김치민


a  점심 준비를 하시는 할머니와 손자, 북어를 다듬어 국을 끓였다.

점심 준비를 하시는 할머니와 손자, 북어를 다듬어 국을 끓였다. ⓒ 김치민


오랜 세월의 풍상이 쌓인 할머니 집을 정리하고 도배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 9시, 트럭에 가득한 도배 도구들을 할머니 집으로 옮겼다. 벽지 풀바르는 기계음이 울리고, 방안의 가구들은 수년 동안의 붙박이 생활을 청산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장농 자리를 보금자리 삼아 생활하던 수많은 바퀴벌레와 켜켜히 쌓인 먼지들이 수난을 당했다.


할머니는 바퀴벌레를 쓸어담기 바쁘시다. 장농 구석에 숨었던 모기는 분풀이라도 하듯 목숨 걸고 마지막 만찬을 즐긴다. 천정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이 사라지고, 손자 녀석의 화풀이 흔적인 벽에 뚤린 구멍들을 테잎으로 막았다. 얽히고 설킨 전선을 정리했다. 이어 풀먹인 벽지가 들려나오고 신들린 듯 놀리는 아저씨의 손놀림이 지나고 나면 금세 환한 모습으로 바뀐다. 주방겸 거실을 마치니 점심 시간이다.

"반찬이 김치뿐인디 어쩌까잉."


할머니의 걱정과 정성을 가득 담은 상이 차려졌다. 마당에서 쿵쾅거리시더니 북어국도 끓였다. 시장기까지 상에 올리니 점심상은 진수성찬이다. 먼지 가득한 방에서 먹는 점심은 그야말로 게눈 감추기다. 벌써 서너시간이 지났다. 할머니의 말투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일손을 거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향은 함경도 원산시 안변면 미원리다. 고향에서 대규모 과수원을 운영하였으나 해방 후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과수원을 몰수당하고 지주 탄압이 무서워 철원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셨다. 철원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관할권이 바뀐 지역이니, 남북의 정치체제를 고스란히 경험하셨다.

오래 전, 대문 앞에 강보에 싸인 채 울고 있는 아이를 거두어 키웠다. 그 아이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니 벌써 십수년이 지난 일이다. 몇 달 전, 강원도에 사는 친척이 찾아와 그 사실을 발설하는 바람에 할머니와 녀석이 상당한 혼란을 겪기도 했다. 얼마전 녀석이 마음을 다스렸는지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말을 해주었다니 참 다행이다.

걍팍한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는 올 초 그동안 수많은 곡절을 함께해오시던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 보냈다. 아직도 할머니 가슴 가득 할아버지가 계시다. 할아버지가 가져오신 전선으로 배선을 했고, 비록 비가 새는 지붕이지만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고, 저놈의 화목 보일러도 할아버지 때문에 아직도 사용하고 계신다며 말씀하시는 것이 자랑으로 들린다.

작은 방에 장농이 세벌이나 있어 문제가 많았지만 옮겨가며 방안 도배가 마무리 되었다. 주방 앞에 얼기 설기 엮어 놓은 지붕 아래로 만들어 놓은 거실을 정리할 차례다. 그런데 지붕이 문제다. 조악한 지붕은 비가림을 하지 못해 온통 천정에 곰팡이를 달아 놓았고, 작은 비에도 줄줄이 샌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지붕에 올라가 고칠 수도 없다. 방에서 걷어낸 비닐 장판을 지붕에 덮기로 했다. 벽지 기술자 아저씨와 몸이 가장 가벼운 학생이 올라갔다. 거실 위 지붕에 발을 올릴 수 없다. 양철 지붕에 올라 장판을 펼쳐 응급조치를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a  도배기술을 나누겠다고 자원봉사를 신청하신 사장님. 도배하는 기술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배기술을 나누겠다고 자원봉사를 신청하신 사장님. 도배하는 기술이 신기하기만 했다. ⓒ 김치민


a  이곳이 거실입니다. 천정에 합판을 대고 수리하는 모습

이곳이 거실입니다. 천정에 합판을 대고 수리하는 모습 ⓒ 김치민


a  거실 위쪽 지붕에는 올라갈 수가 없다. 장판으로 지붕 비가림 공사중

거실 위쪽 지붕에는 올라갈 수가 없다. 장판으로 지붕 비가림 공사중 ⓒ 김치민


a  도배가 끝나고 정리한 뒤

도배가 끝나고 정리한 뒤 ⓒ 김치민


큰 문제 없이 마무리 되었다. 쓰레기를 치우고 가져온 도배 기기들을 정리했다. 살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대문을 나섰다. 이리 저리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눈에 가득하다.

"할머니, 마무리하실려면 너무 힘드시겠어요.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
"아이고 뭘요. 시나브로 나 혼자 하면 되지요."

오전 내내 아저씨들이 무섭다며 방안에서 나오지 않던 네살박이 꼬마가 밖으로 나와 강아지와 논다. 자원봉사에 나섰던 학생들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할머니 집을 나서니 벌써 해가 기운다. 시내로 향했다. 차안에서 모처럼 자원봉사 아이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자원봉사에 나선 학생들은 순천공고 3학년들이다. 함께 참여해 하루 종일 불평없이 일해준 학생들이 너무도 대견하다. 그 중 둘은 얼마 후 광양제철 협력업체에 실습을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 중 한 학생은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렵다. 어머니는 몇 달 전 쓰러져 입원한 후 지금까지 의식 불명의 상태로 입원해 있으며, 아버지는 한 달 전 일터에서 사고로 다쳐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가정환경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습 급여가 동생과 병상의 부모님께 다소의 도움이 될 것이다. 힘든 생활을 견디며 밝은 모습으로 자원봉사에 임해준 학생이 정말 고맙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다르다. 어떤 이는 남에게 해를 주며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살피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나누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원봉사에 나서준 아이들과 모처럼 쉬는 날 등산, 낚시 등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려운 이웃에 소중한 시간을 내준 선생님들이 그렇다. 자신이 가진 재주를 나누겠다고 선뜻 자원하신 도배기술자 사장님이 계셔서 이번 일을 할 수 있었다.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돈만으로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소중한 것들을 나누겠다는 마음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봉사단 홈페이지와 신김치도덕교실 홈페이지에도 올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봉사단 홈페이지와 신김치도덕교실 홈페이지에도 올렸습니다.
#조손가정 #자원봉사 #도배봉사 #나누리교사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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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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