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대 의자 놓기, 그게 그렇게 어렵나요?

[기고]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캠페인 벌이는 이유

등록 2008.10.01 22:11수정 2008.10.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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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오전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서서 일하는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단 출범식에서 참가사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의 정맥류 발생 위험이 매우 높다며 아픈 다리 문제 해결이 1순위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한상균

7월 22일 오전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서서 일하는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단 출범식에서 참가사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의 정맥류 발생 위험이 매우 높다며 아픈 다리 문제 해결이 1순위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한상균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임금을 둘러싸고 벌이는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고용문제가 크게 대두돼 고용과 임금의 문제로 노동문제는 이해되곤 하지만, 사실 노동자 자신에 있어서 건강권만큼이나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없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건강은 곧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재로 인한 실직은 단순한 실직이 아닌 재취업의 기회 자체가 봉쇄되는 것이고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엔 그야말로 '파멸'인 것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착각에 빠져 살듯, 노동운동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는 일상적인 동시에 핵심적인 과제로 설정된 예는 많지 않았다. 이제 노동자건강권, 즉 노동안전의 문제는 중대 재해에만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기본 권리로서 인식되고 실현돼야 한다. 특히나 과잉경쟁에 기반한 노동강도 강화가 광범하게 확산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동안전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이 보다 절실하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 앞의 자랑스런 타이틀 '과로사회'

 

7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과잉생산의 단계에 접어든 자본주의가 만성적 불황에 빠져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정책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개방화, 규제완화, 민영화, 노동유연화 등을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는 불황과 경쟁의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 시키는 정책이다.

 

자본은 WTO 등의 세계기구를 통해 국가의 무역장벽과 산업보호정책을 철폐시킴으로써 경쟁을 격화시킨다. 경쟁의 격화로 인해 '국제경쟁력'은 의심받지 않는 절대가치가 되고 이를 통해 자본은 더욱 과격한 경쟁을 요구하며 노동강도를 강화시킨다. 또한 자본의 요구에 따른 개방화와 공공부문 민영화는 각종 산업단위의 통폐합과 더불어 무자비한 구조조정을 수반한다.

 

이에 따라 과잉인구, 즉 실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고 실업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자본의 부당한 요구를 감내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노동강도 강화에 시달려야만 한다.

 

노동유연화란 곧 언제든 자본이 자르고 싶을 때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과 더불어 혹사시키고 싶은 만큼 혹사시킬 수 있는 노동통제 시스템을 말한다. 이렇듯 경기가 나쁠 때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과도한 노동을 강요한다는 것은 일면 모순인 듯 보이지만, 불경기의 해결책으로 경쟁의 심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은 초과노동에 의한 초과이윤에 어느 때보다 집착한다.

 

우리나라는 '과로' 사회로 접어든 지 오래다. OECD 국가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뉴스가 안 될 정도이다. 최장의 노동시간이 불행스러운 것은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최장의 노동시간은 오히려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산재왕국'이라는 오명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뿐이다. 1년에 3천여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산재를 당하는 노동자의 처지는 자본에 의해 일상적인 전쟁에 내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신자유주의는 이 일상적인 노동현장의 전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산업재해가 전혀 줄지 않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정부와 자본은 최근 산업안전법을 불필요한 규제로 규정 개악(완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일례로 노동강도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골격계질환의 증가 추이를 보면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된 1997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2003년까지 이전과 달리 수배에 달하는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해 그 어떤 실직적인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노동부가 앞장서서 산업안전법이 과도하게 사용자들을 규제하고 있다며 개악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을 축출하는 대신 저임금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는 값싼 여성노동력을 선호한다. 2007년 현재 남성노동자의 47.4%가 비정규직인데 반해 여성은 67.5%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특히나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 폭발적인 증가세에 있는 유통서비스노동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이로 인해 노동강도 강화에 따른 산업재해의 증가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비정규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노동자의 산재율 증가에 있다. 불건강 노동에 내몰린 여성들의 건강권 문제는 그 범위가 확대되는 동시에 그 영향은 자녀에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중대하고도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유통서비스 여성 선결과제 1순위 '아픈 다리'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이란 기치를 내건 민주노총의 캠페인은 적잖은 사회적 관심과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

 

한 대형유통업체의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서서 일하는 시간이 9~11시간으로 답한 사람이 67%에 이른다. 또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개선돼야 할 과제 1순위로 41.5%의 응답자가 아픈 다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은 강요된 감정노동으로 인해 스트레스성 질환 및 산부인과, 위장, 요통 등 많은 질환에 노출돼 있으며, 그 발병률은 50%가 넘는 믿기지 않는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유통서비스직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돼 있으나 노사를 가릴 것 없이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해왔다. 이는 산업안전보건법을 현장에 충실히 적용해야 하는 정부의 직무유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서비스업무 나아가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은 노동자가 고객을 늘 서서 응대해야 한다고 믿어 왔으며 이를 강요해 왔다. 더불어 서비스업무의 바람직한 감정표현을 권장하는 것을 넘어 감시와 통제를 통해 과잉친절이라는 감정노동을 요구해 왔다. 한편 소비자들 또한 이러한 유통서비스 현장의 살풍경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으며 서비스노동에 대한 존중이 나의 노동에 대한 존중, 즉 노동에 대한 포괄적 존중으로 이어진다는 사회적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이란 캠페인의 정신은 "의자는 곧 존중입니다"라는 문구로 요약되기도 한다.

 

근면은 선이고 휴식은 악이라는 자본의 얘기는 차라리 자물쇠는 선이고 열쇠는 악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순이다. 민주노총은 현재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의자 놓기 사업을 추진 중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사업이 전체 서비스노동자의 보건안전과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람직하게 재고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동자의 보건안전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책임문제를 제시하고 서비스노동자 누구나 스스로 건강과 안전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자'는 단지 앉는 물건에서 더 나아가 노동과 휴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상징이자 기초로서 기능할 날을 기대한다. 일상의 노동은 곧 일상의 휴식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모르는 과로사회, 즉 신자유주의는 지속가능한 사회체제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덧붙이는 글 박성식 기자는 민주노총 홍보부장입니다.
#여성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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