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분짜리 소박한 행복, 빼앗을 권리 있나?

라디오 작가가 느낀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연설

등록 2008.10.13 19:05수정 2008.10.1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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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디오 방송 제작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라디오 부장도 아니고 라디오 피디도 아니다. 일개(?) 프리랜서다. 그래도 라디오 관련 일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아무리 디지털시대라 하지만 라디오가 주는 아날로그 매력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매력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시대에 웬 감성적인 태도가 미덕이 되는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그것은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가 주는 따뜻함, 둥금, 낮음, 느림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라디오를 통해 듣는 이야기는 호소력이 있다. 설득력이 있다.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라도 친근한 라디오 DJ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이야기는 웃음이 나고 일면 수긍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사람의 귀를 잡아끄는 묘한 힘이 있다. TV와는 또 다르다. 아마 라디오가 감성적인 도구라는 점에서 일단 누군가의 이야기에 반론을 제기한다기 보다는 공감하기 쉽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은 국민이 잘하라고? 또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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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 라디오방송국 제작 풍경. ⓒ 최은경

사진은 한 라디오방송국 제작 풍경. ⓒ 최은경

 

오늘(13일) 아침,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감성적 접근을 했다'는 제목의 뉴스를 보았다. 오늘 아침 7시 KBS 라디오를 통해 8분여 간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연설 전문을 보니 역시 감성적 접근이다. "요즘 참 힘드시죠? 저 역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로 운을 떼더니 수위였던 자신의 부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경기 체감에 깊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일껏 국민들의 아픔에 동조한다는 식의 뉘앙스를 내비친 뒤 해외여행을 자제하라, 국내소비를 더 강화하라는 등 훈화식의 연설을 늘어놓았다. 몇 년 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내용이다.

 

사실, 감성적으로 '말'로 접근하기보다는 이성적 '발'로 보여줬으면 하는 것이 국민들의 한결 같은 마음일 터이지만 백번 양보해서 감상적인 접근? 좋다. 어차피 사람은 감성적 동물 아닌가. 공중파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도 모자라 라디오 청취자들까지 공략한 대통령의 성의와 정성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짜증이 난다. 월요일 아침부터 대통령의 일장연설을 들어야 한다니.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 훈화시간이 떠오른다.

 

80년대 초등학교로 돌아간 월요 라디오 연설

 

지금의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교장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했다. 학생들은 아무도 공감하지 않고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오직 선생님들만이 교장 선생님 눈치봐가며 떠들고 딴짓하는 학생들 눈치주기에 급급했다.

 

매주 월요일이면 들어야 했던 그 훈화는 정말이지 너무나 지겨웠다. 오늘의 그 라디오 연설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고개 숙이고 묵묵이 들어야했던 그 교장 선생님 훈화와 다를 것은 무엇인가? 지겨웠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공감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다. 대부분은 인터넷 홈페이지나 문자로 사연을 보내지만 지금도 손글씨로 편지를 쓰거나 정성스럽게 엽서를 꾸며서 보내는 사람도 간혹 있다. 특히나 지방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나 사연을 보내는 분들은 굉장히 자부심과 정체성이 높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그것을 서로 공감하면서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은 어제 오늘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도 아니고 대부분 사춘기 시절부터 라디오 주파수에 귀기울이며 수많은 편지와 엽서를 부쳤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 공감한다. 이번 대통령 라디오 연설은 수많은 이름 모를 라디오 청취자들이 정성껏 꾸며놓은 사람맛 나는 사랑방에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거침없이 들어오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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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디오스타> 한 장면 ⓒ 영화사 아침

영화 <라디오스타> 한 장면 ⓒ 영화사 아침

 

라디오 마이크에 외치기보다는 '너나 잘하세요'

 

그깟 라디오에 대통령이 8분여간 이야기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는 대통령의 홍보기관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니다. 특히나 라디오는 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아침 라디오 방송 몇분에 생활정보를 얻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날씨, 교통, 문화정보… 더구나 월요일 아침이면 이야기는 더욱 많아진다. 혹은 한 잔의 커피를 만들어놓고 잠시나마 감미롭고 소박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 그 몇분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가게 문을 열기 전, 컴퓨터를 켜기 전 라디오를 들으며 잠시 숨고를 시간이다. 그들에게는 대통령의 '훈화'보다는 용기를 주고 북돋워주는 살가운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그 서민이 주인인 프로그램에 대통령이 나와서 월요일 아침의 감수성까지 송두리째 앗을 권리는 없다. 일제식민지 시절의 잔재에다 군사독재시절의 위압까지 느껴지는 우울한 '애국조회'식 라디오 연설, 과연 국민들이 좋아할까?

 

정작 그 연설을 들어야할 '높은 분'들은 그 시간에 절대 라디오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통령님. 그 연설, 우선 라디오 마이크에 외치기보다는 높은 분들에게 좀 들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KBS 사태를 보면서 느꼈던 씁쓸함, 분노가 다시 한번 치밀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008.10.13 19:05 ⓒ 2008 OhmyNews
#라디오 연설 #이명박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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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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