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43) 말과 언어

[우리 말에 마음쓰기 452] ‘다시 나타남’과 ‘재등장’

등록 2008.10.18 12:15수정 2008.10.1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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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다시 재등장

 

.. 미나카이의 존재를 알게 된 나는 순간적으로 미나카이백화점을 현시대에 다시 재등장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미나카이백화점>(하야시 히로시게/김성호 옮김, 논형,2007) 3쪽

 

 “미나카이의 존재를”은 “미나카이가 있었음을”이나 “미나카이 발자취를”쯤으로 다듬습니다. ‘순간적(瞬間的)으로’는 ‘그때 바로’나 ‘퍼뜩’ 같은 말로 손질합니다. ‘현시대(現時代)’는 ‘지금’이나 ‘오늘날’로 손봅니다.

 

 ┌ 재등장 : x

 ├ 등장(登場)

 │  (1) 무대나 연단 따위에 나옴

 │  (2) 어떤 사건이나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이나 현상, 인물 등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옴

 │

 ├ 다시 재등장시키고 싶다

 │→ 다시 내보내고 싶다

 │→ 다시 나오게 하고 싶다

 │→ 다시 선보이고 싶다

 └ …

 

 국어사전에는 ‘재등장’이라는 낱말이 없네요. 그렇지만 이 낱말이 “다시 등장”을 뜻하는 줄은, 한자 지식이 어느 만큼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헤아리겠지요. 그러나저러나, 이 보기글을 보면 “다시 재등장”이라고 적습니다. 그냥저냥,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다가 얼결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책을 엮는 출판사 일꾼도 알아채지 못하는 채, “다시 재등장”이라고 적습니다.

 

 ┌(1) 다시 등장시키고

 └(2) 다시 보여주고

 

 이 자리에서는 적어도 “다시 등장”으로는 고쳐야 알맞습니다. 한자말 ‘등장(登場)’을 꼭 넣고 싶다면 “다시 등장”으로는 고쳐 주어야 합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구태여 ‘등장’ 같은 말은 안 넣어도 넉넉하다고 생각한다면, ‘나타나다-내보이다-내보내다-나오다-선보이다-세우다’ 같은 우리 말로 알뜰히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옮긴이가 처음부터 ‘내보내다’나 ‘보여주다’나 ‘세우다’ 같은 낱말을 적었다면, ‘다시’를 앞에 넣고 ‘再’를 앞에 붙이는 겹치기말이 나타날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첫끈을 잘못 꿰어서 뒤따르는 말이 엉성궂게 되었습니다.

 

ㄴ. 일본말은 ‘나와 너’의 언어

 

.. 일본말은 ‘나와 너’의 언어이다 ..  <일본, 허술한 강대국>(프랭크 기브니/김인숙 옮김, 뿌리깊은 나무, 1983) 74쪽

 

 학문을 하는 분들은 ‘말’이라는 낱말보다는 ‘언어’라는 낱말 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도 ‘말 다루는 과’는 없고 ‘언어학과’만 있어요. ‘말글학자’는 없고 ‘언어학자’만 있습니다.

 

 ┌ 언어(言語) :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   - 언어 감각 / 언어 구사 / 언어 습관 / 언어 규범 /

 │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언어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

 ├ 일본말은 ‘나와 너’의 언어이다

 │→ 일본말은 나와 너가 맺는 말이다

 │→ 일본말은 나와 너로 이루어져 있다

 │→ 일본말은 나와 너로 나누어진 말이다

 │→ 일본말은 나와 너로 갈라 놓는 말이다

 │→ 일본말은 나와 네가 나누는 말이다

 │→ 일본말은 나와 네가 나눈다

 └ …

 

 보기글 앞머리에는 ‘일본말’이라 적더니, 바로 뒤에는 ‘언어’라고 적습니다. ‘일본어’가 아닌 ‘일본말’로 적었으면서, “나와 너의 말”이 아닌 “나와 너의 언어”로 적으니 아쉽습니다. 얄궂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어긋납니다.

 

 ┌ 언어 감각 → 말느낌 / 말맛 / 말빛

 ├ 언어 구사 → 말하기

 ├ 언어 습관 → 말버릇

 ├ 언어 규범 → 말법 / 말틀

 └ 언어를 가졌다는 → 말을 한다는 / 말을 주고받는다는 / 말이 있다는

 

 사람들이 주고받을 때에만 ‘말’이지 않습니다. 한 나라나 겨레에서 쓸 때에도 ‘말’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언어 규범’을 찾을지 모르나, 말하는 틀거리이니 ‘말틀’이요, 말하는 법이니 ‘말법’입니다.

 

 “언어를 구사(驅使)한다”고 해야 말을 잘하는 듯 여겨지는가 모르겠는데, 말을 하니 ‘말하기’입니다. 말을 잘하면 ‘말을 잘한다’이며 ‘솜씨있게 말한다’입니다.

 

 말을 할 때 보여주는 비슷한 모습이니 ‘말버릇’일 테지요. 말을 할 때 다가오는 느낌이니 ‘말느낌’이고, 때와 곳에 따라서 알맞춤하게 낱말과 말투를 잘 살리는 사람이라면 ‘말맛’을 아는 사람이며, 낱말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고루 살필 줄 아는 이들은 ‘말빛’을 가려내는 사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10.18 12:15ⓒ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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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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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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