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은 힘이 세다

등록 2008.10.22 10:59수정 2008.10.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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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운전을 잘하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미끄러져가는 자동차의 속도에 놀라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야간 운전이라도 하게 될라치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캄캄한 국도나 지방도를 가야 할 상황이 되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의 운전 솜씨는 맹인이 지팡이로 길을 찾아가듯 더듬거리는 수준에 가깝다. 그래서 야간 운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있다.

 

  내일은 시어머님 생신이다.

  어제 저녁에 미역국을 끓이고, 돼지갈비를 얇게 저며 양념에 죄어 놓았다. 오늘 퇴근하자마자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퇴근을 한다. 거리는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마음이 급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보지만, 하루 내내 서서 일하는 터라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다. 하지만 출근 또한 이른 아침이니 어머니 생신을 챙길 시간은 오늘 밤 뿐이다.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40여분 걸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다. 자주 얼굴을 뵙고 식사 한 끼라도 챙겨드리고 싶은 것은 언제나 마음뿐, 출근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하는 나로서는 늘 종종거리며 시간을 쫓기기 일쑤다.

 

  바쁜 걸음으로 집에 도착해 보니 아이 둘은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나는 냉장고에 준비해둔 반찬을 꺼내 싼 다음, 아이들을 깨워 집을 나선다. 잠이 덜 깬 탓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이들은 걸음을 휘청거리면서도 할머니 집에 가자, 는 말에 한 마디 투정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 자동차에 오른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켠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께 전화를 한다.

  저녁 드셨어요?

  아니, 이제 막 들에서 깨 털다 들어오는 길이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어머니가 몸에 붙은 까끄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는지 투덕투덕 소리가 난다. 그러자 불현듯 들판에 수묵화처럼 번져드는 저녁 이내가 눈앞에 펼쳐진다.

  저녁 드시지 마세요. 저 지금 출발해요.

  순간, 투덕거리는 소리가 뚝 그치더니 어머니 목소리가 다급하게 따라붙는다.

  캄캄한디 머 헐라고 와야. 피곤헐틴디 애기들이랑 어서 밥이나 묵제.

  배고파도 조금만 계세요. 제가 가서 차려 드릴게요.

  아야, 오지 마야. 내 말 들어라이.

  피곤에 젖은 몸이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주저앉으라 유혹하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다녀와야 마음이 편하다. 이럴 때는 말 안 듣는 며느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

  염려 마세요.

  전화를 끊는다. 어둠 속에서 운전할 일이 걱정이지만, 말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살아온 삶이 여직 양에 안찼으면서도, 말만큼은 언제나 자신 있게 한 듯싶어 웃음이 나온다.

 

  길을 나선다.

  조금 가다가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고, 조금 더 가다가 노점에서 수박을 산다.

  시내를 벗어나자, 드문드문 이어지던 가로등 불빛은 사라진다. 인적 드문 국도로 접어들자, 캄캄한 어둠이 바다처럼 펼쳐진다. 허리를 단단히 곧추세우고 눈을 부릅뜬다. 더듬더듬 가노라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자동차 하나가 앞서 가고 있다. 조바심을 내며 앞 차의 꽁무니에 따라붙는다. 앞 차의 후미등 불빛에 의지해 길을 가는 것이다. 길 가장자리를 비춰주고 있어 운전하기에 한층 편하다. 장애물을 미리 파악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커브길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앞서 가는 자동차는 운전이 서툰 내게 등불처럼 길을 밝혀주는 존재다. 마음이 든든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자동차는 옆길로 빠져 나가버린다. 캄캄한 어둠이 절벽처럼 다시 앞을 막아선다. 발밑이 푹 꺼져버린 듯 두려움이 엄습한다. 길 곳곳에 허방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속도를 늦춘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자동차 한 대가 앞서 가고 있다. 울컥 반가움이 솟는다. 다시 앞 차의 꽁무니에 따라붙는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자동차는 또 다른 길로 빠져 나간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아, 알겠다.

  만남과 이별의 숱한 인연들.

  캄캄한 어둠을 더듬거리듯 혼자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길에서 만나는 불빛들은 동행하며 나를 인도하는 따뜻한 불빛인 것을. 잠깐씩 지나치는 인연이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내게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등불이었나.

 

  이윽고 마을길로 들어선다.

  가장자리 외딴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하나가 어둠 속에서 가물거린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다. 나는 불빛에 이끌리듯 좁은 시골길을 따라 올라간다. 밤늦은 시간,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은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등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등불을 높이 켜든 채 마중 나와 있는 것 같다. 따뜻하고 든든하다. 나는 불빛이 끄는 대로 두려움 없이 길을 간다.

  너는 내 말을 도통 안들어야. 고 놈의 생일이 머시다고.

  마당에 서성이고 있다가 차가 들어선 것을 보던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나무라신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어머니는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려서는 두 아이를 한꺼번에 껴안는다.

  오메, 내 새끼! 잤는가.

  그러자 뒤에서 주춤 바라보관 계시던 아버지가 한 말씀하신다.

  이 늦은 시간에 멀라고 오냐.

  아버지의 핀잔이 따뜻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신다.

 

  조도 낮은 불빛 아래 고부와 조손이 고개를 맞대고 저녁밥을 먹는다. 뒤쪽 소반에는 아이들의 생일 축하 노래를 받았던 케이크가 놓여 있다. 나는 양념을 헤집으며 잘 익은 갈빗살을 어머니 밥 위에 올려준다. 어머니는 더 잘게 나누어 아이들 밥숟가락 위에 차례로 올려놓으신다.

  할아버지도 드세요.

  오목오목 밥숟가락을 밀어 넣는 아이들을 쳐다보던 아버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잔잔하다.

  오냐, 너희들도 많이 먹어라.

 

  상을 물리기도 전부터 어머니의 성화가 시작된다.

  늦기 전에 어서 가봐라이.

  아네요. 괜찮아요.

  나는 부엌으로 상을 옮겨와 주섬주섬 반찬정리를 시작한다.

  괜찮당게. 피곤한디 너도 얼른 가서 쉬어야제.

  그 사이 아버지는 어머니가 미리 싸놓으신 갖가지 푸성귀들을 차에 옮겨 실으신다.

  설거지를 하려면 수세미를 빼앗고, 방을 쓸려면 빗자루를 빼앗는 어머니에게 쫓겨 떠밀리듯 마당으로 내려선다.

  다음에는 주말에 올게요.

  그런 소리 마라. 너도 주말이믄 빨래하고 청소하고 바쁠 것인디, 쫌이라도 쉬어야제.

  아무 소리도 없이 지켜보고 섰던 아버지께서 참견을 하신다.

  여긴 걱정할 것 없다. 애기들이랑 너나 잘허면 되제.

 

  집을 나선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잠깐 차를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가물거리는 불빛. 어머니 아버지가 서 계시는 것만 같다. 저 불빛도 오래지 않아 사위어가겠지. 지켜봐주고 언제나 따뜻하게 감싸주던 두 불빛.

  고개를 돌리려던 나는 불현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슬며시 웃어준다. 무구한 저 눈빛. 그래, 너희들의 눈빛이 내겐 등불이겠지. 내 삶의 길잡이, 내 삶의 증거가 될 눈빛들.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듯 마을길을 내려오는 동안 뒷자리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을 두 아이를 생각한다. 너희에겐 또 내가 불빛이 되어야겠지. 앞서 걸으며 어둠 속의 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지.

 

길로 들어서기 전, 나는 또다시 허리를 곧추세운다. 곧이어 더듬거리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2008.10.22 10:59 ⓒ 2008 OhmyNews
#불빛 #부모님 #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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