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부부 최고의 날

아이들이 용돈을 모아 결혼 18주년 기념일을 차렸어요

등록 2008.10.29 16:23수정 2008.10.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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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트 모양의 노란 베고니아 꽃말이 "짝사랑"이라는데, 우리 가족은 전생에 짝사랑하던 사람들이 만났나보다.

하트 모양의 노란 베고니아 꽃말이 "짝사랑"이라는데, 우리 가족은 전생에 짝사랑하던 사람들이 만났나보다. ⓒ 한성수




어제(10. 28.)는 우리부부의 결혼 18주년 기념일입니다. 나는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 아침 7시경에 집을 나섭니다. 해마다 결혼기념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내어서 올해도 뭔가 이벤트를 해 볼 생각입니다. 지갑을 꺼내보니 겨우 5만원이 들어있습니다. 아이들 학원비와 집안행사가 많은 가을철에는 특히 생활이 빠듯해서 내 용돈도 줄어들 수밖에 없나봅니다.

나는 동네 고기 집에서 삼겹살과 소주 한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낼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 우선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마음을 나누는 데는 전화가 좋습니다.

"어디요? 전화 받을 수는 있소?"

아내는 '아이들 학원비라도 보태겠다'며 지난달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한 달 동안 농촌으로, 시장으로 다니면서 받은 돈이 부대비용을 제하면 60만원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전업주부를 할 때보다는 기분이 좋아 보여서 반대를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통화 가능하구요. 지금 농촌 들녘 한가운데, 비닐하우스에 있어요."
"내가 노래 한자락 할께. 무슨 노래인지 곡목을 알아맞혀 봐요."
나는 작게 소리 내어 노래를 부릅니다.


- 결혼기념일의 노래 / 홍민 -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내 가슴은 뛰었소.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그건 사랑이었소.
당신이 내게 다가올 때 나는 알고 있었소.
소리 없이 내게 찾아온 그건 행복이었소.


아~ 봇물 같은 사랑.
이 가슴 깊은 거기에서하늘까지 터진 사랑.
백년을 두고 태워도 끝이 없을 우리사랑.

"아! 알겠어요. 결혼기념일의 노래! 다른 사람들이 결혼기념일을 <괴로운 기념일>이라고 한다던데, 억지로 노래 부르는 건 아니지요?"
"그럼요, 내가 이 세상에서 건진 제일 큰 행운이 당신인데요."

나는 다시 2절을 읊조립니다. 경운기가 지나가는지 "탈 탈 탈"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립니다.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 내 가슴은 뛰었소.
호수처럼 멀리 일렁이는 그건 사랑이었소.
당신의 미소 한 조각에 세상은 빛났소.
가슴속에 가득 채워진 그건 행복이었소 .

아~ 밀물 같은 사랑.
비바람 몹시 불어와도 바다처럼 깊은 사랑.
백년을 두고 태워도 끝이 없을 우리사랑.

노래가 끝났는데도 아내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한참 후에 들려 온 아내의 젖은 목소리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맙니다.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마워. 가사처럼 당신의 미소 한 조각에 정말 세상은 빛나는걸!"

전화를 끊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표시가 있습니다. 고2 딸입니다.

"오늘 일찍 오셔서 어머니와 즐거운 추억이 담긴 하루를 보내세요. ^^ 화이팅!!"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준 딸이 참 대견합니다. 업무를 마치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합니다. 직장이 시골이라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합니다.

a 아이들의 편지와 축하자금 돈은 한달에 2-3만원인 용돈과 사촌누나에게 받은 문화상품권을 현금화 했단다

아이들의 편지와 축하자금 돈은 한달에 2-3만원인 용돈과 사촌누나에게 받은 문화상품권을 현금화 했단다 ⓒ 한성수



저녁 7시! 집을 들어서는데, 발소리를 들은 딸아기가 문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거실에는 하트모양을 한 노란 베고니아가 놓여 있습니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버지! 오늘은 두 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셔야 할 날! 두 분을 위해 저희가 마련했습니다."
"베고니아가 참 예쁘네. 고마워! 그리고 너희가 돈을 어떻게 모았니?"
"그런 건 묻지 마시고요. 레스토랑에 가셔서 스테이크 드시고, 와인도 한 잔 하시고요."

12만원이 든 봉투를 호주머니에 넣고 우리는 딸아이에게 떠밀려 집을 나섰습니다.

"마누라! 아이들 정성도 있는데, 기분좋게 레스토랑에 밥 먹으러 갑시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은 것도 5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밥값으로 그걸 다 써요. 그냥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합시다."

나는 아내의 고집에 시장으로 향합니다. 우리가 들어간 막창 집은 손님이 많습니다. 아내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소주를 마십니다. 나는 아내에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맥주를 따릅니다. 우리는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칩니다. 소리가 참 맑습니다. 고기가 참 고소하고 값도 적당합니다. '고기 먹은 손님에게 밥과 된장이 1,000원에 제공된다'며 아내가 좋아합니다.

"결혼기념일의 노래, 다시 불러 주세요. 저도 배우게!"

고기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팔짱을 꼭 낀 채, 나는 선창을 하고 아내가 따라 부릅니다.

"가사가 참 좋다. 당신처럼 된장 맛이 난다."
"집에 들어가서 틀어 줄께. 홍민씨가 불렀는데, 목소리가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데"

집에 들어서는데, 집이 캄캄합니다. 문을 열자 중2 아들과 딸애가 쪼르르 달려 나옵니다. 거실에는 촛불이 켠 케이크가 놓여있고, 아르마 촛불로 분위기를 잡아 놓았습니다.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아이들의 노래가 끝나고 촛불이 끝나고, 우리는 한참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못난 저희 부부에게 이런 귀한 아이들을 주셨는지, 저희부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결혼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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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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