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는 물결에 지워지지 않는 글씨

[역사소설 소현세자 117] 가슴에 박힌 대못

등록 2008.11.06 11:45수정 2008.11.0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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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나루터 표지석.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변에 있다. ⓒ 이정근


"전하를 모시고 산성으로 들어갈 때는 이곳에서 내리지 않았는데 왜 변경되었느냐?"

귓속말로 나직이 묻는 소현의 눈은 예리했다.


"예, 저하! 당시에는 수군 진영이 있는 송파진과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는 송파나루터가 별도로 있었는데 지금은 통합되었습니다."
"왜 그리 되었느냐?”
"나라에서 강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백성들이라 했는가? 그 연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의 자발적이라니 소현은 더욱 알고 싶었다.

"청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나루터에는 시신이 즐비했습니다. 주검을 목격한 백성들이 원한 맺힌 혼령들을 두렵게 생각하여 송파나루터(津)를 멀리하고 진(鎭)을 이용하다 보니 이제는 송파진이 나루터가 되었습니다."

시신이 산을 이룬 송파나루터

전쟁의 참화를 겪은 송파나루터에는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 겁탈하고 죽인 부녀자의 목 없는 몸. 포로로 끌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병약자들. 북으로 끌려가는 어미 등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와 강물에 쳐 박힌 아기들.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백성들은 송파나루터를 멀리했다.


오늘날에도 잠실철교와 잠실대교가 있다. 다리는 분명 다리다. 오가는 사람도 같다. 하지만 교통수단이 다르다. 당시 송파에는 수군진영 송파진과 일반 백성들의 교통로 송파나루터가 있었다. 진에는 병선이 있었고 나루터에는 나룻배가 있었다. 이렇듯 양분된 송파 도선장이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소현과 박종영이 배에 올랐다. 먼저 오른 승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행색으로 보아 장사꾼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요대가 청색인 것으로 보아 아직 출사하지 않은 선비 같아 혼란스러웠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멀리 보이는 남한산성을 바라보았다.

"저기 촌닭 같은 놈은 누구야?"
"글쎄, 양반집 자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따위 말이 어디 있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사대부집 자제 같아."
"저놈이 사대부집 자제라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어?"
"갓끈이 상아영(象牙纓)이잖아."
"이런 곰탱이 같으니라구, 얌마, 저것이 어찌 상아구슬이냐? 주영(珠纓)이지."
"그렇다면 저놈이 양반 행세하려고 가짜 구슬을 달았나?"
"그럴 수도 있지. 난리 통에 돈 가지고 양반 된 놈이 어디 하나 둘이냐."
"아휴 속 터져, 포졸들은 뭐하고 저런 놈을 안 잡아 간다지?"

새로움과 호기심을 쫒아가는 사람들

나룻배의 승객들은 하나같이 들떠있었다. 강을 건너면 새로움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윤이 목적인 장사꾼은 어떤 손님을 만날까 기대에 부풀어 있고, 선보러 가는 신랑은 색시가 얼마나 예쁠까 설레고 있었다. 부보상들의 중얼거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공이 뱃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역수한파 저문 날에 홀로 앉았으니 돛대 치는 소리도 서글프구나
창해만리 먼 바다에 외로운 등불만 깜박거린다.
연파만경 수로창파 불리워 갈제 뱃전은 너울너울 물결은 출렁
하늬바람 마파람 마음대로 불어라 키를 잡은 이 사공이 갈 곳이 없다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놋 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굿거리장단에 율동적인 가락이 구슬프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삼배수건으로 문지르며 사공은 계속 흥얼거렸다. 뱃놀이 가자는데 가락은 왜 이리 슬픈지 모르겠다. 노동을 놀이로 승화시키려는 안간힘이 애처롭다.

"건 그렇고 청국에서 돌아온 세자가 소용 조씨한테 쪽을 쓰지 못한다면서?"
"쪽이 뭐야? 완전 석 죽는 거지."
"왜 그런데?"

궁중 사람들은 모두가 호랑이 밥이다

"야, 생각을 해봐라. 돌아가신 인열왕후가 갑오생 말띠거든, 그래서 갑인생 범띠 소용 조씨가 잡아먹었단 말이야. 주상전하가 을미생 양띠지, 세자저하가 임자생 쥐띠이니 어떻게 대적할 수 있냐 말이다. 어림도 없지."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한데."
"그럴 듯 정도가 아니야 얌마, 어린나이에 국모가 된 중전도 갑자생 쥐띠이고 청나라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봉림대군도 기미생 양띠란 말이야. 지금 궁에서 소용 조씨를 대적할 사람은 이번에 세자저하께서 귀국하실 때 데리고 들어온 석린이 하나밖에 없어. 허나 그 아들 이 경진생 용띠이긴 하나 심양에서 태어나 물이 없어. 물이 있어야 승천하는데 어림없어."

줄줄이 꿰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지난번 한양에 들어갔을 때 칠패시장에서 들었다. 왜?"
"너 그 따위 허무맹랑한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간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부서지는 물결에 지워지지 않는 글씨

나룻배가 강심에 이르렀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사나운 물결이 뱃전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보던 소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결에 지워지지 않는 글씨가 있었다. 대청황제공덕비. 다시 한 번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현이 강을 건너고 있는 그 시각. 인조가 도승지 김광욱을 불렀다.

"세자를 들라 이르라."
"세자저하께서 잠시 궐밖에 나가 계십니다."
"이런 고얀 일이 있나? 과인도 모르게 세자가 궁밖에 나가다니. 호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당장 들라 이르라."
"호위대장과 훈련대장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뭣이라고?"

인조는 분노에 입술을 떨었다.
#송파나루터 #상아영 #주영 #칠패시장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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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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