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장준하와 김준엽의 감격적인 만남

[김갑수 역사팩션 149]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1.07 08:56수정 2008.11.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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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청년은 홍석훈의 뺨과 가슴과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절규했다.

"홍동지, 여기는 당신이 죽을 땅이 아니지."

그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세 청년은 맥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때 홍석훈의 얼굴이 슬며시 움직였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보았다. 그러고는 흙 한 줌을 쥐어 코에 대어 보더니, "나는 못 가겠어. 여기서 죽게 해 줘" 하고 쉰 목소리로 말한 후 다시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고향의 흙 향기를 맡았음일까? 세 사람은 낙오해 죽게 될지도 모르는 한 친구의 얼굴을 처연히 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홍석훈을 들어 올려 양쪽에서 부축했다.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얼마를 걸어갔는지 몰랐다. 앞서 걷던 윤경빈이 소리를 질렀다. "물이다!" 그들은 환자를 내버린 채 냇물로 달려들었다.

물세례를 받은 홍석훈은 깨어났다. 그는 고맙게도 걸어 주었다. 몇 시간 후 그들은 참외밭을 발견해 미친 듯이 주린 배를 채웠다. 그들은 포만감을 느끼며 한참을 더 걸었다. 이번에는 앞에 가던 김영록의 다리가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주저앉는 듯하더니 아예 엎어져 누워 버린다. 그러고는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세 사람은 김영록을 끌고 밭으로 들어가 다 함께 잠이 들어 버렸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청년들의 얼굴과 가슴에 내리고 있었다.


일본군 점령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네 청년

장준하는 잠결에 어렴풋이 기차 기적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그는 깊숙한 내면에서부터 두려움이 솟아올라 완전히 잠을 깨고 말았다.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장악한 것은 점과 선, 즉 역과 철도뿐이라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역이나 철도가 가까운 곳, 즉 일본군의 점령 지대임이 틀림없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청년들은 자기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러니 날이 새더라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똑같은 벌판뿐이었다.

그들은 진로에 대하여 각자 의견을 내놓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아주 싱겁게 내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숨어 있다가 밤이 되거든 움직이자. 지금 죽어가는 몸으로 얼마를 더 걷겠느냐. 낮에 쉬면서 동정을 살핀 후 밤에 걷는 것이 낫다. 아니, 철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기보다는 차라리 인가를 찾아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등으로 각자 의견을 내다가 그대로 있자는 쪽으로 모아진 것이다.

그들은 팔베개를 하고 흙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그때 네 사람은 가까이서 들리는 인기척에 놀랐다. 불과 며칠 사이에 청년들은 꽤 대담해져 있었다. 그들은 담담하고 침착하게 인기척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태를 메고 있는 중국인 농부가 서 있었다. 농부는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도망쳐 버렸다. 일이 묘하게 뒤틀어지고 있었다. 청년들은 어차피 노출되었으니 마을로 가 여기가 어디인지나 알아보기로 했다. 사실은 우선 밥이나 얻어먹고 보자는 욕구가 더 작용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농부가 중국 관내의 사람이라면 일본군 복장을 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놀라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서 일본군을 사칭하며 협박하여 밥을 먹든지 아니면 돈을 주고 음식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우선 먹고 볼 일이다. 운명에 맡기는 도리밖에는 없다.'

네 사람의 생각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기울었다. 그들이 큰 길을 건너자 아늑한 야산을 배경으로 10여 호 민가가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쪽으로 걷다가 우뚝 발을 멈췄다. 십 수 명의 농부들이 모여 앉아 걸어오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농부들은 옹기종기 모여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네 젊은이는 중국 농부들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중국 농부 몇이서 손짓을 하며 그들을 불렀다.

동작으로 보아 와서 같이 먹자는 뜻인 것 같았다. 중국인들의 조반은 '쨈삥'이라는 것이었다. 밀가루를 부쳐 속에 야채와 고기를 넣고 둘둘 말아 먹는 음식이었다. 네 청년은 다짜고짜 남아 있는 음식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 표정으로 보아 중국인들은 그다지 불쾌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준하는 이곳이 일본군 관할 지역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차와 물을 수통에 두둑이 채웠다.

팔로군 부대를 향해서

장준하는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그들에게 정보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 든 농부를 붙잡고 물었다. 농부는 앞에 보이는 산을 넘으면 팔로군 부대가 있다고 했다. 산까지는 삼십 리 정도의 거리라고 했다. 장준하는 돈을 내보이며 음식을 더 사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농부는 집에 가서 많은 양의 쨈삥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참외까지 사서 주머니에 넣고는 팔로군 부대가 있다는 앞산을 향해 걸었다.

그들이 얼마 안 갔을 때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두세 명은 장준하 일행을 겨누고 있었다. 장준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몰랐다.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밭에서 사람의 머리들이 올라오더니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그때서야 장준하 일행은 자기들이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투항의 신호로 급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들은 포위망을 좁혀 오다가 상대가 비무장인 것을 확인하더니 총을 내리고 다가왔다. 일단 장준하는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중국인이라면 셋 중 하나일 터이다. 그들은 팔로군이거나 왕정위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가장 운이 좋다면 장개석의 중국군 유격대일 수도 있었다.

장준하는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권총을 보았다. 구식 모젤 권총이었다. 그렇다면 중국군 유격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일본군은 아니니 어서 대화를 터 보아야 했다. 아무래도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자기들을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준하는 두 동지의 얼굴을 본 후, 상기된 표정으로 땅바닥에 한자를 썼다.

"우리는 한국 학도병, 3일 전 일군 병영 탈출."

중국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흙에 글씨를 썼다.

"일단 연행한다."

네 젊은이는 중국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좁은 냇물을 건넜다. 나무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올려다보니 나무 위에서 총을 내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장준하 일행을 보더니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치 원숭이 떼를 연상시켜 장준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마적단 소굴로 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윤경빈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호위하던 중국 청년이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네 청년은 부락에 닿아 다시 한 번 몸수색을 받은 후 어느 집으로 인솔되었다. 아마도 지휘 본부인 듯싶었다. 그들은 장준하 일행을 의자에 앉혔다. 장준하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문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한 중년의 사나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평복을 입은 사나이는 풍채가 우람했다. 그에게는 관록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와 인자함 같은 것이 있었다.

사나이가 장준하 일행에게 중국어로 말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짐작컨대 '중국말을 좀 아느냐?'정도인 것 같았다. 장준하는 책상 위에 있는 붓과 종이를 가리키며 사용해도 되느냐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얼른 붓을 집어 장준하에게 주었다.

'아(我), 한국 청년. 일군 탈출. 욕(欲), 한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중국군 편입 무방.'

붓끝을 눈으로 따르던 사나이는 장준하가 쓰기를 마치자 대뜸 악수를 청해 왔다. 그러더니 붓을 들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 우리의 영수는 장개석 총통.'

바야흐로 네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들은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낼 수 없었다. 기어코 성공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네 사람 앞에 나타난 홍안의 청년

사나이는 다시 붓을 들었다.

"배가 고픈가?"
"많이 고프오."
"이곳에서 20리 북방에 우리 사령부가 있는데, 오늘 밤에 당신들을 그리로 보낼 거요. 그곳에 가면 한국 청년 혁명 동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얼마 후 음식이 들어왔다. 청년들은 빵과 계란과 제육 등을 양껏 먹었다.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미소가 번져 나왔다.

이십 리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호송인은 네 사람의 늦은 걸음을 한심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그는 핀잔조의 중국말을 여러 번이나 씨부렁거렸다. 얼마 후 그들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조그만 마을에 들어섰다.

호송인은 네 사람을 어느 집 마당의 밀집 낟가리 앞에 세워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중국 군복을 입은 홍안의 청년이 나왔다. 그는 여러분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와락 달려들면서 장준하의 팔을 부여잡았다.

"한국 분들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청년은 부여잡은 손에 힘을 보탰다.

"탈출이시지요?"
"탈출입니다."
"저도 탈출병입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스카다 부대 한국 학도병 탈출 1호 김준엽이었다. 게이오대 학생이었고, 5개월 전에 탈출했다고 그는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소개됩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소개됩니다.
#장준하와 김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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