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공인 성장통 '수능', 아이들이 무사하기를...

'수능' 이후 부쩍 크는 아이들, 이들의 세계 인정하자

등록 2008.11.13 11:18수정 2008.11.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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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불순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수능을 앞두고 고3 아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남학생 한 명이 찾아와 수능을 앞두고 3일을 못 잤는데, 보건실에서 수면제를 받을 수 있느냐며 찾아왔다.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보건실에서는 수면제를 처방할 수 없다. 병원 방문을 권유하면서, 잠을 잘 잘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한 여학생은 갑자기 생리통이 심해졌다며 허리를 제대로 못 편다. 원래 생리통이 심하지 않았는데, 시험을 생각하니, 긴장감 때문에 더 아파진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일회용 핫팩과 진통제를 주면서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고, 싱겁게 먹는 것도 생리통 경감에 효과가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변비와 설사로 고생인 아이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감기, 두통, 소화불량,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안쓰럽다. 두려움과 불안, 긴장감은 여러 증상들을 품어올린다.

 

수능이 끝나고 나면 쓰나미가 휩쓸고 간 것처럼 이 증상들은 학생들에 따라서 경감되거나 증폭된다. 수능을 경험하고 난 후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부쩍 자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시험을 치르고 난 후 수능이 생각만큼 별 것 아니구나, 대범해지는 아이들이 있다. 수능 전에는 자신의 실력을 생각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진로를 생각하던 아이들이, 실제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 말로 거들떠보지 않던 대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생각보다 갈 수 있는 대학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게 아이들의 설명이다.

 

반대로 수능 이후 불안감이 극도로 심해지는 아이들도 있다. 수능에서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했다는 자책감은 때로는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몰고 간다.

  

자살 소식에 두려움에 떨고

 

a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 보는 수험생들. "얘들아, 너희들의 미래는 너희가 결정하렴"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 보는 수험생들. "얘들아, 너희들의 미래는 너희가 결정하렴" ⓒ 권우성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 보는 수험생들. "얘들아, 너희들의 미래는 너희가 결정하렴" ⓒ 권우성

학교에 발령받은 첫 해, 수능 고득점 학생의 자살 소식이 주요 뉴스를 장식했다. 내심 고 3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수능을 보고 혹여나 못된 생각을 하지나 않을까 싶어, 보건실에 오는 아이들에게 꼭 수능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해야겠다, 결연한 다짐을 했다.

 

"얘들아, 혹여 수능 결과 나오고 너무 절망하면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너희 존재 자체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 잊어서는 안 돼."

 

잘 알지도 못하는 온갖 철학과 교양을 끌어다가 생명의 소중함을 설파를 했는데, 아이들 답변이 걸작이다.

 

"선생님, 걱정 마세요. 공부 잘하는 애들이야 자존심에라도 더 좋은 대학가야한다고 발버둥이지만, 공부 못하는 저희는 상관없어요. 위를 바라보면 아찔하지만요, 아래를 바라보면 편안해져요. 저희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전국에 천지인데, 무슨 걱정이에요." 

 

나는 아이들의 그 명랑함에 반해 버렸다. 스물도 안 된 아이들이 관조하는 세상이란, 내가 받아들이는 세상의 영역보다 훨씬 깊고 넓었다.

  

"왜 옆에서 자꾸만 대신 결정해줍니까?"

 

상담 연수에서 교육학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선생님, 자신들이 공부 잘 했다고, '이것도 못해?'라고 아이들 너무 기죽이지 마세요. 꼴찌도 선생님이 되어야 아이들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혹여 아이들이 수능 시험 망치고, 울상이다가,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하면, 아이들 말 무시하지 마시고, 에그, 점수 맞춰 그냥 대강 지원해라, 그러지 마시고, 드디어 우리 학교에, 우리 가정에 큰 인물이 났다고 격려해주세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조금만 해보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쉽게 중단하는데, 끝까지 해보겠다고 결심하는 게 어디에요? 또 자기가 점수 맞춰 대학 지원하겠다고 하면, 그 결정을 존중해주세요.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옆에서 자꾸만 대신 결정해줍니까? 그냥 놔두세요. 아이들은 참 똑똑합니다. 실패도 해보고, 좌절도 해보고, 현실과 타협도 해보고, 뛰어넘기도 해 봐야 성장하는 것 아닙니까?"

 

대수능, 대한민국 국가 공인 성장통의 날!  아이들이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11.13 11:1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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