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울수록 중고를...

<중고 가게를 찾아가다> 시리즈 / ① 헌책방 정은서점

등록 2008.11.14 09:08수정 2008.11.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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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포 선셋>의 첫 장면. 비엔나에서 6개월 후 만남의 기약, 그러나 9년간 봉인돼버린 그들의 시간.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헌책방에서 그들의 단절된 시간은 접합된다. 과거의 시간과 지식과 정취가 그대로 보존된 헌책방에서 그들의 추억도 되살아난다.

정은서점 정은서점 앞
정은서점정은서점 앞윤성민


헌책방 정은서점은 신촌에 자리 잡고 있지만 번화함과는 거리가 먼 곳에 문을 열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쌍굴다리 지나 한적한 거리를 걷다보면 작지만 책으로 가득한 가게를 발견할 수 있다. 문을 열자 압도할 만한 양의 헌책과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맞이한다. 여기까지 걸어온 복잡한 신촌 거리가 딴 세상처럼 느껴진다.


정은서점 높이 쌓여진 헌책들
정은서점높이 쌓여진 헌책들윤성민

책 높이가 내 키의 곱절은 돼 보인다. 그 높이로 벽면을 다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20,30평 넓이의 가게를 사람이 겨우 지나갈 길만 남겨두고 모두 그렇게 책이 쌓여있으니 책 권수가 엄청나다. 주인인 정재은 씨에게 몇 권이나 되나 물어보니 주인인 자신도 너무 많아 다 세어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존 헌책방 이미지와 달리 분야별로 책들이 잘 정리돼 있어 산만하지는 않다.

책의 종류도 다양하다. 컴퓨터 서적부터 철학서까지, 국내 소설부터 영미 소설, 불문 소설까지 대형서점 못지않게 스펙트럼이 넓다. 소장 도서의 다양성이 이 헌책방의 특색이자 자랑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이곳에서만 16년, 명지대 근처에서 했던 시간까지 합하면 30년의 시간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덕분이다. 그리고 30년 동안 대학가 근처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책의 질적 수준 또한 높다. “책을 좀 아는 사람들은 우리 책방에 오면 딱 알죠.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가.” 정씨는 자랑 섞인 설명을 덧붙인다. 사실 이 곳에서 고전 중에 없는 책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절판돼 시중에서 찾기 어려웠지만 제목은 유명한 책도 곧잘 보인다.

정은서점 주인 주인 정재은씨. 기자가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
정은서점 주인주인 정재은씨. 기자가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윤성민


정은서점을 찾은 11월 13일은 수능시험일이었다. 정씨는 30년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대학시험 보는 날은 항상 손님이 없다고 한다. 이 날도 기자 외에 한 명의 손님만이 더 있었다. 그는 대학원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신촌에 올 때면 근처에 위치한 4곳의 헌책방을 포함해 이 곳에 들른다고 한다.

꼭 구입 희망 목록이 없어도 들러서 좋은 책을 발견할 때마다 산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찾던 책을 여기서 찾은 경험도 소개했다. 그럼 일반 서점이 아닌 헌책방을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 첫째로 구하기 어려운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저렴한 가격을 들었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헌책방만의 독특한 매력도 빼놓지 않았다.

손님 대학원생 손님
손님대학원생 손님윤성민

책의 가격이 일일이 쓰여 있지 않았다. 주인 정씨에게 물어보니 최근에 나온 책은 좋은 출판사의 책은 반값을, 그렇지 않은 출판사의 책은 반값 이하를 받는다고 한다. 옛날에 나온 책은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 당시 가격의 반절 가격으로 하면 천, 이천 원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은 희소가치에 따라 주인 임의로 가격을 책정한다. 절판돼 흔하지 않은 책은 비싸고, 흔한 책은 싼 편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이 요즘 책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우면 중고물건을 파는 가게가 잘된다고 한다. 헌책방도 그럴까? 주인 정씨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헌책방의 특성상 아는 사람들만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사기 때문에 불황기에도 별 차이가 없단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과 다르게 옛것을 찾지 않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정은서점 헌책으로 가득한 서점
정은서점헌책으로 가득한 서점윤성민


헌책방을 오랜만에 찾으니 잊고 있던 여유를 찾은 것 같다. 옛 사람들의 유물을 간직한 채로 시간이 멈춰버린 어느 동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곳은 으슥한 분위기가 아닌 설렘 가득한 공간이다. 삐뚤삐뚤 도열한 책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자니 마치 모든 책이 내 것만 같고, 지식인이 금방이라도 될 것 같은 순진한 두근거림. 책 세 권을 집고 나와 계산한다. 새 책이라면 삼, 사만 원 했을 텐데 만원이란다. 하지만 아낀 돈에 대한 만족감보다 지식에 대한 음험한 욕망이 마음 속을 채운다.
#헌책방 #중고서적 #중고 #정은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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