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동상을 보며 혁명을 추억하다

[책으로 읽는 여행 33] 이상엽의 <레닌이 있는 풍경>

등록 2008.11.15 17:30수정 2008.11.15 17:57
0
원고료로 응원
a

책 <레닌이 있는 풍경> ⓒ 강지이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은 곧 사회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첫출발이었던 레닌은 러시아와 주변국 곳곳에 동상으로만 남아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책 <레닌이 있는 풍경>은 몰락한 이 땅을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이다. 부제를 통해 작가 이상엽은 '그 변화의 풍경에서 혁명의 추억'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흔히 말하는 386 세대, 격변기를 보낸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작가인 저자가 전하는 레닌이 있는 풍경은 쓸쓸함과 혁명의 향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책의 첫 장은 여행을 통해 만난 다양한 레닌 동상의 사진들을 보여 준다.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의 레닌 동상부터 시작하여 혁명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과장되고 확대된 동상까지, 그 다양한 모습만큼 레닌은 시베리아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랑 신부가 레닌 광장으로 야외 촬영을 왔다. 친구들도 따라왔다. 러시아 사람들은 경조사가 있을 때 레닌을 찾는다. 왜 그러냐고 하면, 그냥 관습이란다. 우리의 혁명가 선생은 이제 젊은이들 결혼 주례 선생이 된 듯하다. 뭐, 그리 나쁘지 않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여정은 만 킬로미터 가까이 된다. 저자는 책의 시작에서 사람들이 비행기로 단숨에 갈 수 있는 하늘 길 대신 수십 일이 걸릴 지도 모르는 철길을 택하는 이유를 "지루해서 어쩔 수 없이 철학자가 되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림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지 못할 이끌림으로 이 여행을 시작하고서 그는 386 세대들의 삶을 돌아본다. 좋던 싫던 사회 모순에 온몸을 던져야 했던 세대.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민주화되는 데에 한몫 했다고 자족하며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새 이 세대들은 집권 세력의 중추가 되었고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그렇게 혁명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는 '개혁'으로 선회하더니 이제는 부패의 대명사처럼 비춰지고 있다. (중략) 분명한 것은 학생 때 정치 좋아하던 친구들은 결국 정치권으로 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권이 지금의 정치적 풍경을 만들었다. …예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바로 그 풍경 말이다."

이 씁쓸한 시대 현실은 사회 개혁이라는 부르짖음을 무색케 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저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첩보요원 출신의 푸틴은 체첸 반군을 소탕할 때 '보나파르트 푸틴'이라 불릴 정도로 독재의 길을 가고 있다.

이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걱정은 대단하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고 한다. 저자가 거리에서 만난 한 시민은 '러시아는 독재가 전통이다. 몽골인, 차르, 스탈린, 그리고 푸틴'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레닌의 공산주의는 이미 러시아에선 푸대접 대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저자는 이 책의 중간에 여행 중에 읽은 서적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소개한다. 미국인이었지만 신생 소비에트를 사랑했던 존 리드가 쓴 책인데, 그의 삶은 영화 <레즈(Reds)>로도 유명하다. 그의 말 중 인상적인 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이다.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광범위하고 소박한 희망에 모든 것을 내건, 인류가 시도한 가장 경이로운 모험"이 곧 러시아 혁명이다.

이렇게 멋지던 혁명의 역사는 이제 러시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레닌 아저씨는 동상으로만 남아, 스탈린의 독재에 신음하던 민중들을 내려다보았고 지금은 자본주의 물결로 혼돈에 싸인 차가운 땅을 지키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민중을 위한 정치'가 제대로 대접을 받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우리 현대사의 민중을 위한 외침들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 민중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노력할 것 같았던 그 옛날 학생회장들은 지금 정치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만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선택한 독특한 여행의 이력만큼 책의 구성도 특이하다. 마지막 부록에서 저자는 '내가 사랑한 소비에트 카메라'를 소개한다. '내, 너를 데리고 혁명을 추억하리라'라는 부제로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사진가. 그가 선택한 카메라와 렌즈는 조르키와 인더스타 렌즈, 키예프와 주피터 렌즈들, 소비에트 최초의 35 mm 라이카형 카메라 페드 등이다.

갓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저자에게 가장 오랫동안 기억될 장면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고 한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장인의 기술을 발휘해 만들었던 카메라로 찍은 오늘의 러시아와 그 이웃들이 가장 인상적이다'라고.

인간은 유한하지만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는 반영구적이서 먼 미래에도 기록으로 남는다. 이 책에 수록된 이미지와 글들은 오래도록 남아 러시아 혁명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이미 혁명의 시대는 끝났지만 말이다.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산책자, 2007


#여행서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대통령 온다고 축구장 면적 절반 시멘트 포장, 1시간 쓰고 철거
  2. 2 '김건희·윤석열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 스님들의 경고
  3. 3 5년 만에 '문제 국가'로 강등된 한국... 성명서가 부끄럽다
  4. 4 플라스틱 24만개가 '둥둥'... 생수병의 위험성, 왜 이제 밝혀졌나
  5. 5 '교통혁명'이라던 GTX의 처참한 성적표, 그 이유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