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다, 사막에서 자야겠다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11] 도보여행 10일(사막 2일)

등록 2008.11.25 10:43수정 2008.11.2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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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키질쿰 사막 끝이 안보이는 사막

키질쿰 사막 끝이 안보이는 사막 ⓒ 김준희


어제 날 재워준 무자파르의 말이 맞다면 오늘 나는 45km를 걸어가야 한다. 나는 생수 1리터 한병을 더 사서 아침 7시에 길을 떠났다. 무자파르는 아직도 자고 있고 그의 부인은 부시시한 얼굴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어젯밤에 마신 맥주 한병과 커다란 메론이 아직 뱃속에 남아 있는지 배도 고프지 않다. 지금처럼 맑은 날씨와 가벼운 몸상태라면 충분히 45km 주파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다. 풍경은 어제와 똑같다. 끝없는 사막과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포장도로.


9시에 한 트럭앞에 서있던 3명의 남자들을 보았다. 이들은 여기서 35km를 더가면 식당이 있단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2시간 동안 10km를 걸어왔다는 이야기다. 시속 5km의 속도로 계속 걸을 수 있을까.

이른 아침의 키질쿰 사막은 글자그대로 상쾌하다. 태양은 뜨겁지 않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걷다가 지루해진 나는 혼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침이슬. 어찌보면 이 노래의 가사야말로 지금의 내 상태와 딱 들어맞는다. 태양은 사막 너머로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이다. 나는 있지도 않은 서러움을 모두 버린 채 이 거친 키질쿰 광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래도 몇번 부르고 나니까 지겨워진다. 나는 길 한쪽에 카메라를 놓고 타이머를 동작시켜서 '셀카'를 찍었다. 내가 걷는 모습을 앞에서 한장, 뒤에서 한장 찍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말 즐거운 도보여행 길이다.

지금의 이 길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일종의 고속도로다. 주위에는 상점도 집도 없고, 화장실도 없다. 아니 사막이니까 온 천지가 다 화장실이라고 해야할까. 주변에 별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차도 빨리 달릴 수 있고, 나도 빨리 걷는 것이 가능하다.

도시나 마을에서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빨리 걷기가 힘들다. 주변에 상점이 보일 때마다 왠지 상점에 들어가서 뭔가를 사야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대신에 사막의 길은 그렇지 않다. 주위에 신경쓸 필요없이 오직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시속 5km라는 속도도 그래서 가능할 것이다.


혼자 사막 길을 걷는 즐거움

a 키질쿰 사막 이 사람은 죽어서 사막에 묻혔을까

키질쿰 사막 이 사람은 죽어서 사막에 묻혔을까 ⓒ 김준희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쉴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늘도 하나 없고 앉을 곳도 마땅치 않다. 배가 고파진 나는 그냥 도로 한쪽에 철퍼덕 주저 앉아서 빵과 사과를 먹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1시. 걷다보니까 저 앞에 세워진 트럭에서 사람이 한명 나한테 달려온다.


"텔레폰! 텔레폰!"

그는 오른손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하며 나한테 이렇게 외친다. 나한테는 휴대폰이 하나 있다. 중앙아시아 전문여행사 SKY114(www.sky114.net)의 조상식 사장님이 빌려준 휴대폰이다. 혼자 도보여행하는 중에 돌발사태가 생기면 연락하라는 의미에서 빌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 휴대폰은 사막에 들어온 다음부터 먹통이 되었다. 아니 대도시를 벗어나면 안테나가 아예 뜨지 않는다. 그래서 휴대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여지껏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트럭운전사는 왜 휴대폰을 달라고 하는 걸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전원을 켰지만 역시 안테나는 하나도 없다.

"휴대폰에 안테나가 없어요!"

그는 자기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것도 통화가 안된다고 말한다. 운전하는 도중에 트럭이 고장나서 연락하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불통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에 공중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을 오가는 다른 운전사들의 휴대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운전사는 어떻게 해야할까. 많이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여기 서서 이 운전사 걱정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와 헤어져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 운전사가 아니라 나를 걱정해야 할 상태다. 어느새 태양은 뜨거워졌는데 난 먹는 시간 약간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쉴 만한 그늘이 없기 때문에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온 것이다. 오전의 상쾌하고 즐거웠던 기분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이제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쉬어야 하는데, 쉬어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떠돌뿐이다. 몸도 정신도 휴식을 원하지만 어디에도 쉴 만한 장소가 없다. 정말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인가 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계속 걸었다. 걷다보면 분명히 뭔가가 나올 것이다.

어디에도 쉴 곳이 없는 사막

a 키질쿰 사막 지평선 까지 뻗어있는 포장도로

키질쿰 사막 지평선 까지 뻗어있는 포장도로 ⓒ 김준희


이렇게 생각하고 걷지만 눈앞에는 계속 사막뿐이다. 오후 3시가 가까워졌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오전 7시부터 걸었으니까 거의 8시간 가까이 걸어온 것이다. 45km라고 했으니까 지금쯤 사막 저멀리 뭔가가 보일만도 한데 아무것도 없다. 무자파르의 이야기가 틀린 것일까 아니면 내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충분히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일까.

저 앞의 고개 하나만 더 넘어보자. 저 고개 위에서 사막을 내려다보면 뭔가가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저 위에서 잠시 쉬어가자. 이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결단을 내려야 한다.

좀더 걸을까 야영을 할까. 저 멀리 또 고개 하나가 보인다. 그곳을 넘어도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물어보는데 이들의 대답은 또 중구난방이다. 누구는 식당까지 5km 남았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20km를 더 가야한다고 말한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오늘 야영하고 내일 아침에 고개를 넘었는데 식당건물이 바로 앞에 있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할까. 나한테 만보계가 있다면 오늘 걸은 거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을텐데.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좀더 걸을까 야영을 할까. 도로 한쪽에 멈춰서 생각해보았지만 아직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앞의 고개 하나만 더 넘어보자. 그곳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미련없이 야영을 하자. 그동안 기대했던 사막에서의 혼자 야영을 오늘 실행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결정을 내릴 시간이 가까워지니까 발걸음도 그만큼 빨라진다. 다시 고개위에 섰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곳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무리다. 족히 40km는 걸어온 것 같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허리의 통증은 숫제 고문 수준이다.

사막에서 야영을 결심하다

a 트럭운전사들 나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다.

트럭운전사들 나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다. ⓒ 김준희


시간은 5시 30분. 해질 때까지 여유가 남아있지만 도저히 더이상은 못 걷겠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지쳤다. 누쿠스에서 우르겐치까지 150km를 나흘만에 주파했던 그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 그냥 드러눕고만 싶다.

지나다니는 트럭에서 운전사들이 나한테 손을 흔든다. 하지만 나는 손도 들어올릴 힘이 남아있지 않다. 여기까지가 내 체력의 한계인가 보다. 나는 이곳에서 야영을 하자고 결심하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쪽에 야영하기 좋게 평평한 땅이 있다. 이곳에서 자자. 사막에 들어온 지 이틀만에 야영을 시도한다.

짐을 풀고 있는데 트럭 한대가 길가에 멈추어서더니 운전사가 날 부른다. 힘들고 귀찮은데 왜 또 그러나.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나는 비틀거리며 그곳으로 가보았다.

"여기서 뭐해?"
"여기서 자려고요!"
"물 있어? 음식 있어?"

그는 트럭 한쪽에서 물을 한병 꺼내고 빵과 말린 과일이 담긴 비닐봉지를 꺼낸다.

"괜찮아요, 음식 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해도 막무가내다. 어서 가져가라면서 억지로 떠넘긴다. 그런데 페트병에 담긴 물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다. 이건 생수가 아니라 수돗물을 그냥 받아온것 같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많아서 담아놓으면 지금처럼 뿌옇게 보인다. 그런데도 그런 물을 현지인들은 그냥 마신다. 상태로 보건데 지금 이 물도 그렇다. 그냥 마시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물이다. 그렇다고 주는 물을 계속 거절할 수도 없다.

사막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a 키질쿰 사막 1인용 텐트를 꺼내서 야영을 준비한다

키질쿰 사막 1인용 텐트를 꺼내서 야영을 준비한다 ⓒ 김준희


나는 물과 음식을 받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생수는 지금 나한테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물은 그냥 씻는 물로 사용해도 될 것이다. 트럭운전사한테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야영할 장소에서 바닥의 돌들을 모두 치우고 1인용 텐트를 꺼넸다.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할 당시 1인용 텐트를 사는데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무게가 가볍고 부피가 적은 것으로 골랐다. 비바람은 막을 수 있지만 별도의 폴대가 없어서 약간 불편하기는 하다.

텐트를 야영지에 펼쳐놓고 그 안으로 침낭을 넣었다. 배낭은 텐트 밖에 놓고, 배낭과 텐트를 끈으로 묶어서 연결시켰다. 혹시 모래바람에 날아가더라도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이 좀더 좋을 것이다. 귀중품과 보조가방은 텐트 안에 넣고 신발도 넣었다. 생각해보니까 신발이야말로 나한테는 귀중품이다.

야영준비 끝! 이렇게 쉬운걸 왜 나는 그동안 망설이고 고민했을까. 나는 텐트 위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좀 전에 받은 빵과 말린 과일을 먹었다. 도보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날이 오늘이다. 그래도 완전히 탈진하기 전에 결정을 내리고 야영지를 선택했으니 다행이다.

해가 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서 사막을 바라보다가 텐트 속의 침낭으로 들어갔다. 텐트 위쪽에 열어둔 환풍창을 통해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이제야말로 완벽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다.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 이곳에서 잠을 푹 자고 상쾌한 사막의 아침을 맞이하기 바란다.

a 키질쿰 사막 사막 너머로 해가 진다

키질쿰 사막 사막 너머로 해가 진다 ⓒ 김준희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키질쿰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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