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일등보다는... "재원아 힘내라"

[꼴찌 히어로] 2년간 서당 공부... 사범대학 입학 꿈꾸는 제자에게

등록 2008.12.31 09:16수정 2008.12.3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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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입니다. 한 해 동안 가장 잘한 사람들, 1등이었던 사람들을 뽑는 자리가 곳곳에서 열립니다. 1등만 수고했겠습니까. 중간도 꼴찌도 모두 열심히 달렸기에 2008년이 마무리됐겠지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뒤에서 묵묵히 받쳐준 이들을 다룹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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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패전. 시즌 최다패 투수. 그저 그런 투수였던 감사용에게 사람들이 그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중에서. ⓒ 슈퍼스타감사용


재원아!

네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설레기도 하고 자꾸만 네 얼굴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네가 나를 찾아온 것이 지난 8월이니까 서너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잘 지내고 있지?

헤아려 보니 너와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벌써 7년을 넘기고 있구나. 너를 생각할 때면 대견한 마음과 더불어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곤 한단다. 어려서 겪은 의료사고로 뇌성마비 장애인이 돼 버렸는데도 꿈을 위해 남들보다 애쓰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단다. 물론 환하게 웃는 멋진 표정이 잇달아 떠올라 미소를 머금게 되긴 한다만.

지난 여름, 너는 처음으로 네가 한문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를 알려주었지. 몇 해를 물었어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는데…. 함께 밥을 먹으며 너는 말했지. 너처럼 늘 꼴찌여서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자상한 선생님이 되어주고 싶어서라고. 그런 한문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날 힘겹게 발음을 이어붙이던 네 목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나는구나.

학창 시절, 다른 친구들처럼 잘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늘 꼴찌일 수밖에 없었다고,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고 했지.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살아온 세월을 나름대로 어설프게 가늠해온 나의 상상과 연민이 무참하게 내려앉는 순간이었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더구나.

3, 4년 전인가. 네가 어느 날 한문 공부를 제대로 해 보겠다며 서당엘 들어갔다고 연락을 해 왔을 때 난 많이 놀랐단다. 몸도 편치 않은 녀석이 서당 공부를 잘 견뎌낼 수 있을지, 암기하고 깨우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을 터인데 얼마나 오래 버텨낼지 반신반의하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너는 보기 좋게 나의 염려를 깨뜨려 버렸지. 무려 2년 동안이나 서당살이를 해냈으니 말이야. 오로지 훌륭한 한문 선생님이 돼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 지루하고 뻣센 시간들을 살아내다니…. '짜식, 독한 놈이군'하는 생각이 안 들었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너는 태연하게 친구들이 군대 다녀올 시간 동안 서당에서 공부를 한 것이니 오히려 네게는 남는 장사라고 했던가. 삶에 대한 무모하리만큼의 긍정과 낙관이 너를 살게 하는 또 다른 힘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단다.

물론 2년 동안 집을 떠나 열심히 서당살이를 해냈다고 해서 네가 공부한 것들이 오롯하게 네 몫이 된 건 아니었겠지. 그곳에서도 너는 또 꼴찌였다고.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많은 그곳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네가 겪어야 했던 고단함과 열등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지.

같은 조건을 갖추고도 경쟁한다는 게 만만치 않은 세상인데,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장마저도 간신히 받은 네가 그들과 한 방에서 동문수학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테지. 잘난 척하는 세상이 네게 또 상처만 준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네가 견디고 감당해야 할 일임을 생각하면 약이 되었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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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과 꼴찌를 가르는 세상. 하지만 모두가 제 나름대로 빛을 내며 반짝인다. 밝기가 다른 그 다양함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진다. 영화 <말아톤> 중에서 ⓒ 말아톤


그 세월을 잘 견딘 덕분에 너는 이제 한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지. 내년까지는 수능 준비를 해서 ○○대학 사범대학에 꼭 합격하고 싶다고도 했어. 친구들은 벌써 복학생이거나 졸업생인데 넌 이제야 거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셈이로구나.

아직 네가 서 있는 그곳은 여전히 꼴찌의 자리이겠지. 네 편보다는 너를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이 더 많은 상황이니까 말이야. 그런 답답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어서 지난 여름 나를 찾아왔던 것일 텐데 내가 그만큼 위안이 돼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삶을 네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길을 찾고 만들어 가려는 너를 보면 대견하단다. 훌륭한 한문 선생님이 돼서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네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벌써부터 웃음이 번진다.

하지만 네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가 바라는 일이 안 될 수도 있을 거야. 삶이란 게 늘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물론 네가 부족하거나 네 노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혹시라도 결과가 그렇다고 모래성처럼 무너지지는 말았으면 해.

일등과 꼴찌를 가르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제 나름대로 빛을 내며 반짝이는 것, 밝기는 다 다르더라도 그들 모두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라는 걸 생각해 봐. 그럼 너는 다른 꿈을 또 꿀 수 있을 거야. 그 꿈이 너를 밀고 가는 상앗대 노릇을 하게 될 지도 모르잖아.

알고 보면 이미 꿈을 이룬 사람들은 다시 꿈을 꾸기가 쉽지 않단다. 다른 이에게 빼앗기거나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그 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다른 꿈을 꿀 엄두를 내기란 사실 불가능하지. 그때부터 꿈은 욕망이 되고 마는 거야. 이루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비겁하게라도 움켜쥐고 있어야 할 욕망 말이야. 네가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처럼 늘 꼴찌여서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네 꿈의 울타리를 조금만 더 넓혀주는 건 어떨까?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말았으면 해. 서두르다 보면 절망이나 좌절이란 단어가 친구가 되려고 손 내밀 테니. 네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길은 얼마든 있을 거라 믿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뎌보길 바란다. 항상 너를 지켜보며 응원할게.

이 편지 받으면 답장 꼭 주렴. 오랜만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답장을 새해 선물로 받고 싶구나. 새해엔 네 꿈이 말갛게 솟아오르기를 바라며 오늘 끝인사는 네게 들려주고픈 노래의 가사를 인용하는 걸로 대신할게. 참, 네가 그토록 바라는 예쁜 여자친구도 생기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건강하게 새해 맞으렴.

"어설픈 일등보다는 자랑스러운 꼴찌가 더 좋다. 가는 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꼴찌도 괜찮은 거야." (노래패 '해웃음'의 '꼴찌를 위하여' 중에서)

2008년 12월 새해를 기다리며 재원이에게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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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재원이는 가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 재원이는 가명입니다.
#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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