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한 일본 젊은이들, 80년 전 소설에 열광하다

[해외리포트] 소설 <게공선> 인기 폭발... '우경화 사회' 변화하나

등록 2008.12.30 17:38수정 2008.12.31 14:15
0
원고료로 응원

'게공선붐'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기사. ⓒ 아사히신문


2008년은 일본에 그 어느 해보다 우울한 소식이 많았던 한 해였다. 물론 일본인의 노벨상 수상 등 좋은 소식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키하바라 도오리마(通り魔, 묻지마 살인)를 비롯한 일련의 무차별 살인 사건과 대학생들의 고용취소 및 파견근로자(비정규직) 해고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지금까지 쌓였던 문제들이 2008년을 분기점으로 대폭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키하바라 도오리마 사건'을 분석하는 잡지의 특집기사가 연일 실리던 올해 여름, 일본 출판계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코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의 소설 <게공선(蟹工船, 일본식 읽기로는 '가니코센')>이 출판계에서 예상을 뒤엎고 돌풍을 일으킨 것은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게공선>은 신쵸(新潮) 문고판으로 지금까지 50만부 이상(6, 7월에만 30만부)을 팔아치웠고, 일본의 대표적인 서점인 기노쿠니야 문고 부문 연간 판매실적에서 8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판매실적은 예년의 약 100배에 해당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게공선>이 가장 많이 팔린 6, 7월은 흥미롭게도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해사건(6월 8일), 하치오지(八王子)살상사건(7월 22일)이 벌어진 달이기도 하다.

연말 일본은 엔고 현상과 세계경제위기 여파로 대기업들의 적자 소식과 연일 이어지는 대규모 감원사태로 충격에 휩싸여 있다. 특히, 도요타 자동차가 1941년 이래 처음으로 경상적자를 낼 것이라는 예상(1500억엔)과 소니의 대규모 구조조정(1만 6천명) 사태 등은 불안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더구나 일본 대학생들의 입사내정 취소 문제는 지난 11월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됐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는 11월 통계를 보면 3만6700명이 해고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게공선 붐'이 사그라질 기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고도성장 세대'에서 '취업빙하기 세대'로

1970~1980년대 일본의 20대가 '고도성장 세대'라고 한다면, 1990~2000년대는 '취업빙하기 세대'(최근의 신조어로 젊은이들의 고용환경을 나타내는 말이다)로 불린다. 취업빙하기 세대의 의식은 2000년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이른바 '게공선 붐'이다.


<게공선>은 1929년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줄여서 '나프')의 기관지였던 잡지 <센키(戦旗)>에 5, 6월 연재된 소설로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작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작자 코바야시 다키지는 세계 대공황이 일어난 해인 1929년 <게공선>에서 소비에트령 캄차카 영해를 침범해 게를 잡고 배 위에서 가공해 통조림으로 만들며 혹사당하고 학대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렸다(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다).

작품의 스토리를 조금 소개하자면, 캄차카 영해에서 게를 잡아 가공해서 통조림으로 만드는 게공선 '하카타마루'에서는 서로 다른 이유로 돈벌이를 위해 모여든 노동자들이 싼 임금을 받으며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노동자들은 게공선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 자본가들에게 부당한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인간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감독인 아사가와(浅川)는 노동자를 인간취급하지 않고 혹사시켜 한둘씩 쓰러지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러한 취급을 달게 받던 노동자들은 서로 불만을 조금씩 나누면서 투쟁을 하기에 이른다.

"이 단편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 침략사'의 한 페이지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는 식민지 조선이나 타이완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코바야시 다키치가 마르크스주의를 기조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썼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코바야시는 1932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잠입했으나, 1933년 2월 스파이의 밀고로 아카사카에서 특고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살해되기에 이른다. 한국에도 올해 8월 <게공선>(양희진역, 문파랑)이 신역(1987년 이귀원 역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이 출판되면서 '게공선 붐'의 여파가 미쳤다.

<게공선>은 '88만원 세대', '촛불 세대' 등으로 대표되는 동시대적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의 젊은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읽히고 있다(고바야시 다키치와 동시대에 창작된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에도 테마는 다르지만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다. 박영희, 최서해, 김기진, 임화, 한설야, 송영 등의 작품을 추천한다).

코바야시 다키치의 시체를 둘러싸고 앉은 동지들. ⓒ 시라카바문학관 다키치 라이브러리


출판 80년 다된 <게공선>, 왜 다시 부활했나

그렇다면 어째서 출판 80년이 다 되어가는 <게공선>이 일본에서 느닷없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지금까지 문학애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었지만 이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적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저변에는 청년계층의 의식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게공선> 붐은 2000년대부터 집중조명을 받아온 우파 저널리스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관련 저작들이 젊은 층에서 인기를 얻고, 야마노 샤린의 <망가 혐한류 1, 2, 3>가 80만부 가까이 팔린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망가 혐한류>에서 <게공선>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대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일 것이다. 여전히 2ch(일본의 포털사이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네트워크 우익'(고이즈미 정권 당시 등장한 세력으로 인터넷에서 우익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혐한류를 주도한 세력이기도 하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일본 사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우경화의 길로 여전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고이즈미 정권 때부터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양산된 사회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노동백서>에 따르면 1991년 62만 명이던 비정규직 노동자는 매년 10만~20만 명씩 증가해 2004년에는 217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취직을 희망하는 실업자까지 넣고 계산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1990년 183만 명, 2001년 417만 명에 이르는 등 <노동백서>에 담긴 내용보다 훨씬 더 많다는 보고도 있다. 417만 명 가운데 15~34세 사이의 '프리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젊은 층의 불만은 날로 커지고 있다.

2008년 5월 2일자 <요미우리신문> 석간 1면에는 "(게공선의) 독자 대부분은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로 폭넓으며 젊은이, 그중에서도 특히 취업 빙하기 세대에게 인기가 있다. 취업빙하기 세대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고용 등으로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라는 분석이 실렸다. 이러한 계층들이 주로 읽어서인지 <게공선>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자신들이 처한 노동환경과 소설 속의 환경이 너무나도 일치한다며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어이, 지옥에 가는 거다!"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게공선>에 공감을 표현하는 젊은 독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그려낸 노동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상업저널리즘인가, 일본 사회 모순의 표출인가

<망가 게공선> 표지 ⓒ 시라카바 인터넷 라이브러리

이른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평론으로 한국문단에서 일본 평론가로는 유일하게 센세이션을 불러오고 각종 논쟁을 낳은 일본의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게공선 붐이야말로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라고 분석하며,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가라타니는 "<게공선>은 실로 권선징악적인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으며, '정치적 실천'의 부활은 물론이고 '문학의 부활'과도 무관한 마치 '연극'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그는 게공선 붐 뒤에는 상업적 계산이 깔려 있으므로 오히려 매우 자본주의적이라고 전제한 후, "'격차'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실제로는 배외주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게공선>을 읽는 사람들이 우익적으로 변하기 쉽다"며 분석대상은 <게공선>이 아니라 '자본'이 돼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바야시 다키치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비평서 <전쟁과 문학>(김정훈 역, 제이앤씨, 2007.10)을 번역출판한 이즈 도시히코는 가라타니와는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즈 도시히코는 "현재의 젊은이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향전환하고 있다. 그들은 직접 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쇼와(昭和) 역사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또한 일본이나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지적 관심을 잃어버렸다. (중략) 그러한 젊은이들이 <게공선>을 읽고 그 잔혹한 착취가 이뤄지는 현실이 자신들의 현실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것"이라고 가라타니와는 다른 의견을 밝히고 있다.

재일조선인 연구자 서경식 또한 이즈 도시히코와 비슷한 분석을 하고 있다. 서경식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고립된 비정규직인 그들은 점점 출구 없는 게잡이 배 밑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다(한겨레신문 2008.6.7)"라며 일본 사회에 대한 어두운 진단을 내리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과 이즈 도시히코, 그리고 서경식의 상반된 '게공선 붐' 평가는 매우 중요한 의견 대립이다.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가운데 '주체' 설정 및 '저항'이 가능한가 혹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미셸 푸코는 물론이고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담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문제인 동시에, 세계지식인들의 현실인식과 이론이 처한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평가는 사실 이즈 도시히코나 서경식의 평가를 매우 촌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초월적 비평'의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포스트모던'한 현실을 넘어선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주체'를 설정한 비평은 가라타니와 같은 평론가들에게는 매우 고지식하고 진부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공선 붐'이 단순히 상업 저널리즘에 편승한 결과인지 아니면 일본의 격차사회에 절망을 느낀 젊은이들의 분노를 드러낸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와 이즈의 엇갈린 견해는 일본사회(세계적인 차원에서도)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또한 두 견해에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일본이 처한 현실 자체를 볼 때 두 의견을 함께 놓고 봐야만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격차사회', '노동빈곤층(working poor)', '취업빙하기 세대'로 불리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과연 '게공선 붐'이 단순히 상업 저널리즘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판옵티콘(panopticon) 속에 갇힌 젊은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가? 1980년대 '고도성장 세대'의 방랑과는 질이 다른 '생존게임'으로 내몰리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의 미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주요기사]
☞ 김형오 의장, 7번째 경호권 발동자 되나
☞ 술 권하는 사회, 뼈다귀 해장국 예찬
☞ 대운하 찬성 단체, 4대강 정비 착공식엔 왜 왔나
☞ [엄지뉴스] 뒤따라오던 지하철이 '꽝'... 실제상황이었으면?
☞ [엄지뉴스] 나도 가끔 남자기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 [E노트] 전여옥 "김형오, 가장 먼저 죽어야 할 리더"

덧붙이는 글 | <망가 게공선>은 시라카바문학관 다키치 라이브러리(http://www.takiji-library.jp/announce/2007/20070927.html)에서 무료 다운로드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망가 게공선>은 시라카바문학관 다키치 라이브러리(http://www.takiji-library.jp/announce/2007/20070927.html)에서 무료 다운로드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게공선 #코바야시 다키지 #가라타니 고진 #서경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4. 4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5. 5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