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캠프에서 행복한 시간. 이땐 나에게 어떤 시련이 닥칠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유하
보일러 고장난 반지하, 김연아 연습장이 따로 없네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자 날 반긴 건 '한기'였다. 포근한 온기를 바랐건만…, 살짝 서운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캠프에 가기 전 보일러를 꺼놨던 게 생각났다.
내 자취 생활의 신조는 이전 글에도 밝혔지만 '아껴야 잘 살죠'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어서 빨리 이 반지하를 탈출하는 것이 인생의 단기 목표다. 캠프를 떠나기 전 기온은 영상을 웃돌았다. 포근한 날씨 때문에 캠프 프로그램 중 썰매타기를 취소해야 하나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날씨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3일이나 집을 비우는 건 낭비이자 사치였다. 미련 없이 보일러를 껐다.
순수한 의도로 저지른 일이 '보일러 고장'이란 참사로 이어졌다. 온도를 최대로 높여도 방바닥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양말을 신었음에도, 방바닥에 발을 내딛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이건 뭐, 김연아가 스케이트 타도 될 정도였다. 김연아의 연습 장소가 없다면 기꺼이 내 반지하를 내어드리리다.
늦은 밤이라 뭘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정말 추웠다. 추위를 잊기 위해 <아미고>를 불렀다. "아미고! 그녈 보다 내가 미쳐, 아미고! 일이 손에 안 잡혀…", 정말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혔다. 씻고 짐 정리 하는 건 진작에 포기했다. 순간 '아미고'는 나에게 전혀 다른 뜻이 됐다.
'아', '미'치겠다! 보일러 '고'장 나서. 한파 몰아친 새벽, 특단의 조치는?일단 하루는 참아보기로 했다. 트레이닝복 안에 내복을 껴입고 양말에 비니모자까지 쓰고 침대에 누웠다. 완전무장을 해도 차가운 공기는 무장이 안 된 이목구비를 괴롭혔다.
언제나 위기 뒤엔 기회가 따르는 법. 세상을 뒤집을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생각났다. 바로 '취침용 헬멧'! 별다를 건 없다. 기존 오토바이용 헬멧에 호흡용 구멍만 코 부분에 뚫어 놓으면 된다. 뒤통수 부분엔 베개를 부착해 일체형으로 제작한다. 눈 부분은 까맣게 칠해서 '취침용 안대' 역할도 할 수 있다. 어떤가? 대박의 조짐이 보이는가?
추우니 이런 잡생각이나 하게 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잠이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어엿한 직장인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마감뉴스에선 "내일 기온이 영하 15℃"라며 겁을 줬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알코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키핑해 뒀던 위스키를 깠다. 안주는 바나나. 쓰디쓴 위스키와 달콤한 바나나는 꽤나 괜찮은 조합이었다. 다섯 잔 정도를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몸이 슬슬 달아올랐다. 바로 엎어졌다. 드디어 잠들기에 성공했다. 새벽 1시였다.
참을 수 없는 청량감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새벽 3시였다. 두 시간밖에 안 지난 것이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해가 떴다. 다크 서클이 쇄골까지 내려왔다. 하루 종일 온몸이 으스스했다. 결국 회사에서 난 '병든 닭'이 됐다.
얼어 죽느니 감전을 택하겠다!그날 퇴근하자마자 주인집을 찾았다. 보일러실이 잠겨있어 주인이 열어줘야 뭐라도 해볼 수 있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인기척이 없다. 절박하고 애타게 불러봤지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그 이름 '주인님'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반지하 김연아 전용 빙상장'에 돌아왔다. 여전히 입김이 폴폴 새어나왔다. 뭔가 조치를 해야 했다. 순간, 감전사건(관련 기사☞
"반지하의 제왕! 네 몸에 전기가 흘러!") 이후 저 멀리 구석에 귀향 보냈던 전기장판이 생각났다.
'얼어죽느니 감전을 택하겠다!'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기장판을 끄집어냈다. 콘센트를 꼽고 섣불리 시도해본 적 없는 9단에 도전했다(일전엔 3단까지만 올려도 뜨끈뜨끈했다). 전기장판을 깔고 앉은 엉덩이가 후끈 달아올랐다. 온기가 온몸에 퍼지며 잠이 솔솔 왔다. 빙상장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유토피아가 도래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5일간 쌓였던 모든 피로가 풀리겠구나' 생각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 오래가지 않았다.
뭐랄까, 난 딱 그것이 된 느낌이었다. 요리에 전혀 자신 없는 자취생이라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그것.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밥에 비벼먹으면 참 맛있는 그것. 그것은 바로 반숙 계란 프라이.

▲ 나는야 전기장판 위의 '계란 프라이'.
김귀현
등과 엉덩이는 지글지글 익고 있는데, 얼굴은 꽁꽁 얼고 있었다. 딱 반숙 계란 프라이였다. 그간 억지로 익히지 않았던 노른자는 얼마나 추웠을까. 미안하다, 노른자야. 익지 않은 노른자처럼 내 얼굴은 누렇게 떴다. 외풍이를 피하고자 이불을 뒤집어쓰면 호흡곤란이 왔고, 이불을 걷어내면 다시 얼굴이 얼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다시 난, 어제 먹다남은 위스키 뚜껑을 열었다.
'아미고'가 주는 또 다른 교훈함께 글을 연재하고 있는 '옥탑녀'의 비보가 전해졌다. 옥탑녀는 나와 함께 어린이캠프에 인솔교사로 참여했고, 나처럼 보일러를 끄는 '삽질'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보일러가 빵 터졌고, 보일러 덮개가 얼굴을 강타해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은 물론, 고장난 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30만원이나 되는 돈을 물어줬다는 것이다.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남일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나도 강타당하는 건 아닌지, 거액의 돈을 물어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근데 주인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신 걸까? 어린이캠프에 가신 걸까? 설움에 겹도록 '주인님'을 불러봤지만,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었다.
아직 반지하의 비상사태는 종료되지 않았다. 오늘도 어떻게 긴긴 밤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어쨌든 이번에도 돈 조금 아끼려다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샤이니의 <아미고>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나처럼 '삽질'을 일삼는 모든 초보 자취생들도 새겨들으시길….
'아'끼려고 보일러 '미'작동하면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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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고! "아, 미치겠다! 보일러 고장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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