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밤에 독립군 이야기를 읽다

하늘을 향해 사람들의 교만한 죄를 빌면서

등록 2009.01.19 14:13수정 2009.01.1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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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눈이 내리는 내 집 뒷산

눈이 내리는 내 집 뒷산 ⓒ 박도


눈이 내리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고 여름은 여름답게 더워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의 생활 리듬도 맞다. 올 겨울은 아주 야무지게 추웠다. 특히 소한인 지난 5일부터 약 2주간 동안 내가 사는 강원 산골마을은 거의 매일 영하 10도 이하의 강추위였다. 내 집 부엌에 있는 수도까지 얼었으니 대단한 강추위였다.

강원 산골의 강추위는 으레 각오한 바, 마땅하여 견딜만하지만 올 겨울은 그동안 비나 눈이 내리지 않아 보름 전부터 겨울가뭄에 몹시 시달리고 있다. 두 식구 간신히 밥만 겨우 끓여 먹을 뿐 마음대로 닦지도 못하고 있다. 원래 강원도 산골마을은 예로부터 눈이 많이 내린 곳으로 알려졌는데 내가 내려온 뒤로는 유별나게 많이 내린 적은 없었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야 겨울가뭄 해소는 물론이요, 봄 농사철에 싹이 잘 내리고, 움이 불쑥 불쑥 솟아나기 마련이다. 

내가 서울에 오가면서 자주 만나는 낯익은 강원여객 운전기사와 텅 빈 시외버스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그는 30여 년 강원여객 버스기사로 일했는데 최근 5년은 버스에 체인을 감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체인을 감지 않은 것은 물론 눈이 내리면 지난날과는 달리 트랙터로 도로의 눈을 밀거나 염화칼슘으로 눈을 녹이는 탓도 있지만, 아무튼 눈이 전처럼 내리지 않는다고 자연 재앙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a  마당의 나무 탁자에 쌓인 눈

마당의 나무 탁자에 쌓인 눈 ⓒ 박도

오늘(18일)은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정오 무렵까지 10여 센티미터는 더 내린 듯하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눈다운 눈으로 풍성하게 내렸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눈이 오는 날은 빨래를 한다고 하시더니, 날씨도 한결 풀리고 처마에서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등,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사람이 제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자연의 재앙에는 속수무책이다. 이번 눈으로 산골마을들은 다소나마 해갈이 될 것이고, 산불 위험도 면할 것이다.

눈이 내린 산촌의 밤


보도에 따르면 지구촌 곳곳이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남극과 북극에는 점차 빙하가 사라지고 남태평양 섬 지방에는 바닷물의 상승으로 삶의 터전이 위협받나 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 강과 산을 마구 뒤집고 파헤칠 모양이다. 그것을 백성 대다수는 박수를 치고 있다니 얼마나 더 큰 자연의 재앙을 입어야 깨우치게 될까?

옛날에는 사람들이 해마다 농사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고사를 지냈지만 이즈음에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죄다 저만 잘난 체 살아가고 있다. 하늘이 이만큼 베풀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에 내려질 벌이 두렵지 아니한가.

a  눈에 쌓인 황토 내 글방

눈에 쌓인 황토 내 글방 ⓒ 박도

하늘이 창조한 이 대자연을 그대로 둔 채 감사하면서 깨끗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게 이 지상의 모든 생명을 위한 바른 길이 아닐까? 한밤중 마당에 나와 하늘을 향해 나의 교만과 오만한 죄을 빌고 빈 뒤 내 글방으로 돌아왔다.

눈이 내린 산촌의 밤은 더욱 고즈넉하다. 옛 시 그대로 온 산에는 새가 날지를 않고, 모든 길에는 사람의 자취도 없다.

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유종원의 <강설(江雪)>에서

뒤늦게 하현달이 떠오르자 더없이 아름다운 밤이다. 이런 밤에는 클래식을 들으며 독립군 이야기를 읽으면 더없이 행복해진다. 안중근 의사가 당신이 여순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펴들었다.

a  앞산에 쌓인 눈

앞산에 쌓인 눈 ⓒ 박도


안응칠 역사

1908년 6월 나는 여러 장교를 거느리고 부대를 나누어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낮에는 엎드리고 밤길을 걸어 함경북도에 이르러 일본군사와 몇 차례 충돌하여 피차간에 혹은 죽고 상하고, 혹은 사로잡힌 자도 있었다.

그때 일본 군인과 장사치들로 사로잡힌 자들을 불러다가 묻기를,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또 일로전쟁(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전서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해 놓고는, 오늘에 와서 이렇게 다투고 침략하니 이것을 평화독립이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역적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했더니, 그 사람들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대답하되,

“우리들의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의 떳떳한 정인데, 더구나 우리들이 만 리 바깥 싸움터에서 참혹하게도 주인 없는 원혼들이 되게 되었으니 어찌 통분치 않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전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허물입니다.

임금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저는 편안히 누워 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분개한 마음이 있건마는 사세가 어찌할 수 없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른 역사판단이 어찌 없겠습니까? 더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백성들로 한국에 건너온 자들이 더욱 곤란합니다. 이같이 나라에 폐단이 생기고 백성들이 고달픈데, 전혀 동양평화를 돌아보지 아니할뿐더러, 일본 국세가 편안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이 비록 죽기는 하는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고는 통곡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의 하는 말을 들으니 과연 충의로운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대들을 놓아 보내 줄 것이니 돌아가거든 그와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를 쓸어버려라. 만일 또 그와 같은 간휼한(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까닭 없이 동족과 이웃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침해하는 언론을 제출하는 자가 있거든, 그 이름을 쫓아가 쓸어버리면 10명이 넘기 전에 동양평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자, 그 사람들은 기뻐 날뛰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므로 곧 풀어 놓아주었더니, 그 사람들이 말하되,
“우리들이 군기 총포들을 안 가지고 돌아가면 군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말하되,

“그러면 곧 총포들을 돌려주마.”
하고 다시 이르기를
“그대들은 속히 돌아가서, 뒷날에도 사로잡혔던 이야기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말고 삼가 큰일을 꾀하라.”
했더니 그 사람들은 천번 만번 감사하면서 돌아갔다.
<안응칠 역사>에서

더 없이 넉넉하고 행복한 밤이다.
#눈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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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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