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읽은 부드러운 남자의 고백

꽃처럼 '피어라, 남자'

등록 2009.01.28 10:32수정 2009.01.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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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피어라, 남자> 표지

<피어라, 남자> 표지 ⓒ 이루

이번 설에는 온 나라에 눈이 많이 내려서 누구나 설설 기는 설이 되어 버린 듯하다. 운전도 천천히 조심스레 하게 되고 집 밖에 나다닐 때도 미끄러질까봐 평소와 달리 발밑을 살피면서 걷는다.

뜻밖의 폭설로 땅바닥을 살펴 걷는 모습들은 조심성 많은 색시걸음이다. 말썽 많은 아이들이나 늘 큰 소리 치는 동네 아저씨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눈 길 위에서는 모두 여성성 특유의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했는데 설날에 꼭 그런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다. <피어라, 남자>(김광화·이루·2009)라는 책이다.


저자는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만날 진다고 한다. 말은 물론 논리에서도 밀려서 결국 꺼내드는 자기만의 무기가 있으니 그것은 삐치는 것이다. 싸우다 안 되니까 토라져서는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고는 드러눕는데 식구들이 안 볼 때를 골라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엌에 가서 몰래 밥을 훔쳐 먹으면서도 삐친 마음을 안 풀고 토라져 있는 이 사람은 짐작과 달리 남자다.

속살대는 귀엣말처럼 책이 감미롭기까지 하다. 풀잎처럼 여린 남자가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자기고백 같은 책이다. 저녁을 먹고 아내가 아이들한테 같이 산책 나가자고 했는데 두 남매가 다 안 간다고 하자 남편은 눈치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가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귀엽다. 책이 귀엽고 남자가 귀엽다. 읽으면서 무릎을 칠 일도 없고 긴장할 일도 없다. 말 한마디로 집안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 아버지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내려앉게 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내에게 “여보. 나 좀 안아 줘”라고 응석을 부리고는 얼른 아내 가슴에 안겨 쑥스런 얼굴을 묻는다.(188쪽)

다가 올 문명의 새로운 덕목은 빼어난 개인능력이나 대중을 사로잡는 통솔력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며 잘 통할 줄 아는 부드러움에 있다고들 말한다. 수용하고 보살피는 여성스러움이 얼마나 많은가가 진보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사회가 여기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지표들은 수두룩하다.

자료를 보니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나라별로 소득격차와 교육기회, 정책결정권한 등으로 평가하는 남녀평등지수가 있는데 한국은 작년에 130개국 중 108위였다. 재 작년에는 128개국 중에서 97위를 했다니 더 나빠진 셈이다.


모든 사람은 양성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남성성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한국사회는 남자들로 하여금 남성적 기질을 일찍 소진하게 하는 것 같다. 늙고 나면 제 손으로 하루 세끼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보다 여러 해 일찍 죽는다.

과부 3년이면 은이 서 말이지만 홀아비 3년이면 서캐가 서 말이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자립능력은 남자가 훨씬 모자라는 게 사실이다.


‘일어서라, 남자’가 아니고 ‘피어라, 남자’라는 책 제목이 책장을 덮으면서야 제대로 가슴에
다가왔다. 꽃처럼, 풀잎처럼 그렇게 섬약하고 이쁜 남자의 탄생을 알리는 책이라는 사실이.

피어나는 남자들로 올 해가 가정은 물론 정치나 사회, 모든 영역에서 부드러움이 넘치고 서로 북돋고 격려하는 날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전북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어라, 남자 - 농부 김광화의 몸 살림, 마음 치유 이야기

김광화 지음,
이루, 2009


#김광화 #피어라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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