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차를 기다리는 서울역에서

일본 큐슈로의 나홀로 기차여행 1

등록 2009.03.18 18:49수정 2009.04.0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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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쨋날 (1/11 일)

서울역 밤 11시. 또 하나의 여행.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오늘의 막차인 야간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시각의 역내는 졸음에 영혼을 잃어가는 자들이 배회하는 스산한 풍경입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북적대던 이곳도 사람들이 어지간히 빠져나가고 이제 갈 곳이라곤 애시당초 없었던 노숙자들만 남은 셈입니다. 이들의 축 처진 어깨와 뭔가가 찍어 누르는 듯 움츠려 굽어진 등 위로 하얀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비추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이 곳 기차역의 진정한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덩치 하는 승무원들도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하는 이들. 이들의 완강한 버팀은 어디서 오는 건지요?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무관심한 척 해보지만 제 신경은 이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행여 이들의 눈빛과 마주칠까 조심스레 두리번거리면서 말이에요. 저는 뻔히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길과 만난다면 시선을 먼저 피해버리는 쪽은 저라는 걸요. 그럼 뭔가 두려워하는 자는 저들이 아니라 저인 셈이 되는 건가요?


'난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이들의 냄새일까? 내게 바짝 달라붙어 뭔가 요구할까봐서?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거리를 두고 싶은 걸까?'

배낭을 뒤져서 수첩을 꺼냅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자비심 연습을 위한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나처럼 이 사람들도 자기 삶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나처럼 이 사람들도 자기 삶에서 고난을 피해보려 하고 있다.
나처럼 이 사람들도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겪어 알고 있다.
나처럼 이 사람들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우려하고 있다.
나처럼 이 사람들도 삶에 대해 배우고 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고개를 처박고 눈을 감아버리고 맙니다. 그 때였을 거예요. 누군가 아주 가까이 제 곁에 바짝 다가와 앉는 거 같았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흘끗 바라보았습니다. 귓전에 아주 낮고 끈적끈적한 남자의 목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다가왔어요.

"저기... 따뜻한 거 뭐 좀 먹겠수? 배 안 고파요?"
"네??? (뭔 소리여?) 아니요..."
가슴이 콩당콩당 뜁니다.
"이봐요... 인생 뭐 있수... 우리... 따뜻한 데로라도 갑시다!"
    
제 목소리는 뭔가에 막힌 듯 터져 나오지 못하고 낮게 그러나 격앙된 어조로,


"^%$$&....당신 뭐야?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여기 여자들이 그렇게 만만해요? 힘없고 가진 거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당신 같은 사람 못 알아 볼 거 같아요? 저기 저 안 보여요? 여자 경관이 왔다갔다 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도... 정말... 제가 가서 신고할까요? 여기 밥 한 끼에 성매매하려는 파렴치한 남자가 있다고 말이에요!"  
"왜 이래... 뭐야... 이건... 재수 없이! 퇘!"

그 파렴치한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습니다. 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 몇 걸음 못가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합니다. 그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입니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뭐야! 누가 누구에게 재수 없다는 거야!'

씩씩거려보지만, 응원해주는 사람도 괜찮냐는 위로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곳의 규칙에는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영역을 벗어난 일인가 봅니다. 그렇게 휭 둘러보는데 근처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갑자기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나오더라구요. 정말 예상 이상으로 영락없이 여성노숙자 행색이지 뭐예요. 꼬질하고 시커먼 배낭여행 복장! 아마 이 행색이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다르다고 믿었던 두 세계,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 사이에 막혀 있던 벽에 구멍을 만들고 순식간에 저를 반대편 세계로 넘어가게 한 모양입니다. 약간의 현기증 같은 걸 느낍니다. 저는 잠시나마 노숙자가 되었던 거지만, 노숙자답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밥 한 끼와 따뜻한 하룻밤의 잠자리가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지요. 그저 지금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립니다.

'그래. 밤은 때론 사람을 흥분시키기도 하지. 근거 없이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파렴치한을 용서하고픈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노숙자들의 현실도 용서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23시 55분 부산발 무궁화호 열차 안은 제법 빈 자리 없이 대부분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시간에 이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기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합니다. 창밖 어둠 속에 불빛이 까칠합니다.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켜놓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형체 없는 부유물이 떠다니는 듯합니다. 아주 잠깐 정신을 놓는 사이 설익은 깜빡 단잠을 잤나 봅니다. 새벽 3시 경산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제 옆의 할머니께서도 지루함을 달래시느라 자다 깨다를 반복하시는지 깨인 한숨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이번 일본 여행의 목적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목적 없이 여행한다는 것이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만 같은 허전한 느낌입니다. 사실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마음은 이랬습니다.

'무작정 떠나는 기분으로 짐을 가볍게 챙기자. 먼 여행 길이라기보다 훌쩍 잠시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아주 가볍게.'

그래서 평소 여행이었다면 챙겼음직한 몇 가지를 과감히 내려놓았습니다. 솔직히는 들었다 놨다는 반복한 끝에 역시 가볍게 가자는 쪽에 손을 들어줬죠. 짐의 무게도, 마음의 무게도 가볍게. 솜털 날아갈 듯이 가볍게. 카메라, 책, 여벌 옷가지, MP3, 가이드북이 이번 여행의 동행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명색에 해외여행인데 배낭이 이리도 날씬해서야 원!

하지만 막상 여행은 시작 되었는데도 기대만큼 가볍지 않습니다. 기차는 앞으로 쉼 없이 달리는데 제 자신은 자꾸 어딘가에 매여 있는 듯한 느낌, 그러나 정작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는. 이럴 때 보통 막막한 안개 속에 갇힌 거 같다고 하나요? 

'마음 여행! 제 마음 속 내면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만나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매 순간마다 얼마나 정직하게 제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멈추었을 때 제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말입니다. 여행 중에 걸을 때, 누군가와 말을 할 때, 역에서 기차 시간을 기다릴 때,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났을 때 그 때마다 제 마음은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할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간섭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지나가도록 허용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에요.'

생각이 자꾸 끊기고 있습니다. 제 뒷자리의 젊은 연인들이 높은 톤으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 말소리들이 자꾸 제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시끄럽다는 생각에 이어 화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듭니다. 이 불쾌한 느낌이 오래 갈 거 같은데요. 이럴 때 연인들의 분위기를 깨지 않고서는 그들이 발산하는 일방적 소음으로부터 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 듯하네요. 하지만 결국 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 상대방의 태도를 바꾸는 방법인데...

'서울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좀 더 감정적이지 않게 지금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하는 사이, 까르르 숨넘어가듯 더욱 높아진 웃음소리. 순간 다짜고짜, '욱!'하는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에 먼저 솟습니다. 하지만, 주무시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먼저 솜씨 좋게 낚아채십니다.

"젊은이들, 거 참 재밌나보구려. 아이구 저리도 좋을까. 하하하. 부럽구려. 하지만, 나 오늘 새벽에 일 나가야 하는 노인네라... 잠을 좀 자둬야 하는디... 좀 조용히 해주먼 좋겠는디...괜않겠소?"
"야! 조용히 하랜다."
다시 낄낄 웃음소리가 이어집니다.
"우리 노래방이나 갈까?"
"그러지 뭐...! 기차 안에 노래방시설도 있고, 세련이야."

뭔가 개운치 않네요. 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젊은 연인이 사라지자 주변은 겨우 조용해지고 할머니께서 제게 찡긋 웃어 보이시더니 다시 평안히 눈을 감으시네요. 내공이 보통이 아니신 할머니!

다시 잠들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할 것이 없습니다.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네요. 수첩을 꺼내어 몇 가지를 긁적이고, 부산역에 도착한 후 해야 할 일들을 하나 하나 꼼꼼히 챙겼는데도 시간은 그리 빨리 달리고 있지 않네요.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는 있다'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입니다.

'이런 상태, 이 무위의 상태가 지고의 행복이라던데? 아닌가?'

다시 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무위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어려운 관문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오고가는 잡념이 한시도 멈추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밀려오는 스토리, 짧은 문장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무료함에서 벗어날 뭔가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후회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이럴 줄 알았을 거예요. 그리고 이럴 걸 미리 예상하고 독하게 일부러 가능한 필수품 몇 가지만 챙겨 넣었던 건데요. 이럴 때마다 저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이제 막 시작입니다만 앞으로 이런 시간들과 얼마나 많이 마주할지요. 막막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미리 이런 시간에 대비하여 군것질거리를 넉넉히 챙겨 넣을까요? 주변의 인물들을 물색하여 말꼬리라도 붙잡고 늘어질 말벗이라도 찾을까요? 대부분 멍하니 축 처져 있다가 자주 시간을 계산하며 숫자와 씨름을 할까요? 마치 코를 킁킁거리며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관심을 끌만한 특별한 사물이나 상황을 찾아 눈을 번뜩일까요?

마음 여행! 그것이 뭐 그리 쉬운 줄 알았나 봅니다. 바로 이렇게 시작과 동시에 금방 벽에  부딪치고 마는데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튼, 전 단순한 가벼운 여행을 시작한 줄 알았는데 혹시 세상에 제일 복잡하고도 무거운 여행을 떠나온 것은 아닐까요?
#일본여행 #기차여행 #기차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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