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문외한을 감동시킨 <지킬 앤 하이드>

배우 류정한에 대한 단상

등록 2009.02.01 12:05수정 2009.02.01 12:05
0
원고료로 응원
뮤지컬을 사랑하는 내 친구

뮤지컬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같은 작품을 두 번은 안 보는 나와 달리 몇 번이고 같은 작품을 보러 가는 친구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른 배우가 공연하면 또 보러 가고, 좋아하는 배우의 공연은 여러 번 보기도 한다.


이 친구가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배우의 공연을 열 번 이상 보았고, 볼 때마다 좋더라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알고 보면 뮤지컬에 열광하는 2-30대 여성은 꽤 많다.

오늘 이 친구와 함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러 갔다. 두 달 전에 예매해서 좋은 자리를 싸게 구했다고 한참 자랑을 한 이 친구는 벌써 4번이나 보았단다.

“류정한 공연으로 골랐어. 너도 분명히 반할 거야!”

내가 그러기는 어렵다고 속으로 말했다. 웬만해서는 감동을 잘 안하기 때문이다.

소설 VS. 뮤지컬


초등학생 시절 나도 다른 어린이들처럼 세계 명작 동화를 열심히 읽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도 그 시절에 접했던 작품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나름의 철학적 성찰을 담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엔 악에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다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보며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넘겼었다.

오늘 뮤지컬을 보면서 문득 이런 진지한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소설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과학만능주의에 빠지던 시절,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선과 악을 분리하는 약도 과학이 발전하면 만들 수 있다고, 당시 사람들은 정말 믿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오만하게도 이성의 힘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유럽인들의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오만함보다는 인간 본성의 이중성을 주제로 잡았다. 그리고 이 주제를 노래와 행동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루시(소냐)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춤추며 노래하고, 코러스 역시 이에 대해 노래한다. 극중 여러 등장인물들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행태를 여러 장면에 걸쳐 보여준다.

원작과 달리 뮤지컬에는 엠마(김소현)와 루시(소냐)라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약혼녀 엠마는 선한 지킬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다. 거리의 여인 루시는 지킬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선한 지킬은 차마 다가가지 못한다. 대신 지킬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악한 하이드는 거리낌없이 루시에게 다가간다. 이들 역시 지킬 내부의 이중적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다.

루시의 캐릭터를 특히 좋아하는지 친구는 이렇게 평가했다.

“최정원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루시를 정말 잘 표현했어. 확실히 연기를 잘해. 김선영의 루시는 너무나 가녀리고 불쌍해 보여서 지킬이 지켜주고픈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겠더라. 오늘 본 소냐는 가창력이 아주 좋았어. 목소리가 정말 시원시원하더라. 난 소냐처럼 열창하는 가수가 좋아.”

배우 류정한을 발견하다

VIP석에서 보는 공연에 가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으로 갔을 뿐이었다. 류정한이라는 이름을 친구가 수십 번 반복해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가 뮤지컬이라는 한 우물을 파기에 좋아한다는 말도, 반할 것이라는 말도 귓등으로 들었을 뿐이다.

류정한은 뮤지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배우라고 한다. 문외한인 나는 오늘 처음 그를 제대로 인지했다. 그는 내가 2002년에 보았던 <오페라의 유령>에도 라울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다.

류정한은 선한 지킬과 악한 하이드를 마치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듯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었다. 지킬일 때 그는 뒤로 묶은 머리만큼이나 단정하고, 자기 일에 열정과 신념을 가진 반듯한 지킬이었다. 목소리도 맑고 청아한 테너의 음색이었다.

하이드가 되었을 때에는 지킬보다 큰 덩치에, 풀어 흐뜨린 웨이브 머리 뒤로 번뜩이는 눈빛을 한, 사악한 하이드였다. 목소리도 하이드를 노래할 때는 좀 더 낮은 저음의 바리톤이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무대 내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바꾸어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이드의 사악한 모습이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그가 루시를 안는 장면이었다. 무대 공연인 뮤지컬이기에 하이드가 루시를 뒤에서 끌어안고 온몸을 더듬는 듯 표현한 이 장면은 영화였으면 야한 침실 장면(?)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선한 지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악한 하이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배우 류정한은 지킬과 하이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목소리로만이 아니라 관객에게 던지는 느낌으로도 전해 주고 있었다.

1막이 끝나고 이런 그의 모습에 감탄했더니 친구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아직 맛보기야. 더 결정적인 장면이 안 나왔어. 2막에서 보라고, 혼자 부르는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창을. 정말 대단해.”

그 장면은 이랬다. 처음에는 한 소절은 지킬로 한 소절은 하이드로 부르더니, 나중에는 한 두 마디 단위로 지킬과 하이드가 교차했다. 자신의 내부에서 싸우는 지킬과 하이드를 서로 다른 목소리로 소화해낸 것이다. 여기에는 지킬과 하이드를 다른 느낌의 색으로 비추어 주는 조명도 잘 어울어졌다. 아무리 무딘 나도 이런 류정한의 노력과 능력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다른 작품에서 만났다면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 같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이기에, 이것이 그의 능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기에 이 새벽에 문외한이 낑낑거리며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류정한은 그런 면에서 잘 맞는 작품과 잘 만난 행복한 배우가 아닐까 싶다. 그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그의 앞날이 계속 기대된다.
#지킬 앤 하이드 #류정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게 뭔 일이래유"... 온 동네 주민들 깜짝 놀란 이유
  2. 2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3. 3 팔봉산 안전데크에 텐트 친 관광객... "제발 이러지 말자"
  4. 4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5. 5 공영주차장 캠핑 금지... 캠핑족, "단순 차박금지는 지나쳐" 반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