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저랑 같이 한국에 가면 안 돼요?"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29] 도보여행 29일(이쉬티한 -> 쿠미쉬켄트)

등록 2009.02.03 17:05수정 2009.02.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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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알리의 집에서 알리와 그의 어머니

알리의 집에서 알리와 그의 어머니 ⓒ 김준희


"형님, 괜찮아요?"

방문 앞에서 알리가 묻는다. 아침 7시. 미안하다. 사실은 안 괜찮다. 1박 2일동안 그렇게 술을 퍼마셨는데 어떻게 괜찮겠나. 편안한 침대 이불속에서 나오기가 싫다. 하지만 오늘도 갈 길이 멀다. 사마르칸드까지 60km라고 했으니까 오늘 최대한 많이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내일 오전 중으로 사마르칸드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씻고 아침 밥 먹고 가요."

알리는 나를 마당 한쪽으로 이끌었다. 이 집에도 상수도 시설은 없다. 커다란 주전자에 담은 물로 알리와 나는 함께 대충 얼굴과 손을 씻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까 알리의 어머니가 음식을 가져온다. 커다란 사발 3개에 흰 우유가 가득 담겨있다. 순간적으로 난처해진다. 이걸 어쩌나. 나는 흰 우유를 먹으면 한시간도 못돼서 설사를 하는 체질인데.

그렇다고 주는 음식을 거절할 수도 없다. 우유 안에는 하얀 쌀밥이 함께 담겨 있다. 해장국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유를 마시고 밥을 떠 먹었다. 별다른 반찬은 없다. 밥이 담긴 우유와 빵을 먹고 녹차를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

"형님, 저랑 같이 한국에 가면 안되요?"

알리는 다시 한국에 오고 싶어한다. 하지만 비자를 정식으로 받는 것이 어려워서 나한테 부탁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초청장을 발급해주면 그것을 가지고 타쉬켄트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으려고 한다.


비자가 있다고 해서 입국이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천공항 입국심사장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무척 까다롭게 대한다고 한다. 누가 초청했는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등을 물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입국을 거부한다. 정식으로 받은 비자가 있어도 입국을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리는 나한테 부탁하고 있다. 입국심사장에서도 내가 알리의 신원을 보증해주면 입국이 쉽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한테 그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해준다면 나한테는 엄청난 책임이 생긴다. 알리가 한국에 입국해서 불법행동을 하게되면, 만일 불법취업이라도 하게 되면 내가 그 연대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리는 분명히 한국에서 취업해서 돈을 벌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알리

a 사마르칸드 가는 길 거리의 목화밭

사마르칸드 가는 길 거리의 목화밭 ⓒ 김준희


소심한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리가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을 베풀어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내가 알리의 신원을 보증해주고 초청장을 발급해줄만한 배짱은 없다. 거절하면 나는 나쁜놈이 되는 걸까.

"타쉬켄트에 가서 좀 알아보고 연락해줄게요. 지금은 뭐라고 장담을 못하겠어요."

그냥 이렇게 답을 미루는 수밖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 번호를 알리에게 알려주고, 앞으로도 자주 연락하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출발이다. 알리의 어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알리와 나는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알리는 사마르칸드로 향하는 큰길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언제든지 전화해요!"

나는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이틀만에 거리에 서니까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만큼은 정말 좋다. 이곳에서 이틀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머리털을 움켜쥐면 알코올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도시를 벗어나자 도로 옆으로는 목화밭이 펼쳐진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한국에서 흰 우유를 먹으면 벌써 화장실로 달려갔을텐데 왜 이곳에서는 괜찮은걸까.

그러자 예전에 보았던 잡지 칼럼하나가 생각난다. 가공해서 살균처리한 흰 우유가 아니라, 소에서 바로 짜낸 생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잘된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리 집에서 먹은 것이 그런 생우유였을까. 도로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병에 담긴 우유를 팔고 있다. 저 우유도 아마 생우유일 것이다.

거리의 식당에서 고기국을 먹고 계속 걷는다. 도로에서 측량기구를 든 현지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데, 그중 한명이 나를 부른다.

"까레야(한국)?"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는 도로 맞은 편에 있는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그쪽을 쳐다보자 나이가 많은 다른 현지인이 도로를 건너오면서 한국말로 말한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일했던 현지인을 또 만나다

a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스한디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스한디 ⓒ 김준희


그는 한국에서 5년 동안 일했다는 이스한디다. 부하라를 지나고 나니까 한국에서 일했다는 현지인들을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된다. 이스한디는 자기가 사마르칸드에 사니까 그곳에 도착하면 꼭 전화하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내가 말했다.

"사마르칸드에는 내일 도착할거에요."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려구?"
"아직 모르겠어요. 걷다가 마을이나 식당이 나오면 잘 수 있는지 알아봐야죠."

그렇게 짧게 인사만하고 헤어졌다. 별 특징없는 거리를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저녁 5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잘 곳을 알아봐야 한다. 그때 자동차 한대가 길가에 서더니 이스한디가 내리면서 나를 부른다.

"아이고, 아저씨 힘들어!"

열심히 걷고있는 내 모습이 힘들어 보이나. 도로에서 일을 모두 끝마치고 이제 퇴근하는 모양이다. 아까 함께 보았던 사람들도 모두 차에서 내린다. 이스한디가 나한테 말한다.

"오늘 여기서 자려구?"
"예. 이 마을에서 잘 곳을 좀 알아보려구요."
"그냥 차타고 나랑 같이 사마르칸드에 가자!"
"아니에요. 저는 여기서 자고 내일 걸어서 사마르칸드에 갈거에요."
"그럼 내가 여기서 잘 곳을 알아봐 줄게!"

그러더니 앞장서서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 한쪽 공터에 앉아있던 한 노인에게 다가가더니 우즈벡어로 뭐라고 말한다. 그 노인과 대화를 마치더니 나를 돌아본다.

"여기 할아버지가 자기네 집에서 자도 된다는데!"

그는 올해 78세의 사불 할아버지다. 앉아있던 곳에서 일어서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고마운 이스한디와 사불 할아버지 덕분에 오늘도 신세질 곳이 생겼다. 이 마을의 이름은 '쿠미쉬켄트'라고 한다. 사불 할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78세의 나이에도 치아가 가지런 하길래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몽땅 틀니다.

이스한디는 나를 사불 할아버지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섰다.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걷다보면 아마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이스한디와 마주치지 않을까. 사불 할아버지는 넓은 집의 마당에 있는 평상에 나를 앉히더니 녹차를 권한다. 그러면서 러시아어로 뭐라고 한참 말을 한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사불 할아버지는 손도 좀 떨리고 기억력도 오락가락한다. '나이가 몇살이냐?'라는 질문을 벌써 5번째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나이어린 손자들이 오가면서 할아버지의 시중을 든다. 여기서 사마르칸드까지는 20km 남았다고 한다. 내일은 기어서라도 사마르칸드에 갈 것이다.

a 사불 할아버지의 집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다

사불 할아버지의 집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다 ⓒ 김준희


a 사불 할아버지 나를 재워준 사불 할아버지 내외

사불 할아버지 나를 재워준 사불 할아버지 내외 ⓒ 김준희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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