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칭송보다 한 사람의 채찍이 중요한 법

[서평] 이문열의 <금시조>

등록 2009.02.04 09:57수정 2009.02.04 09:57
0
원고료로 응원
a 이문열의 금시조 금시조 표지

이문열의 금시조 금시조 표지 ⓒ 휴이넘

▲ 이문열의 금시조 금시조 표지 ⓒ 휴이넘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생활 속에서도 책을 읽을 여유를 가질 수 있음은 행복이다. 어렵사리 틈을 내서 한 권의 책을 펼쳐들 때마다 내 마음은 깨우침을 주는 인물을 만나고 싶은 기대감으로 설레곤 한다. 이 달에는 이문열씨의 걸작 금시조를 읽었다.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거대한 새, 금시조를 죽음의 순간에 발견하는 고죽의 일대기를 그린 금시조는 나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웅혼한 필재와 문인화의 3대가로 꼽히기도 했던 스승 석담과 기예로 천품을 타고난 고죽의 팽팽한 대립이 주는 긴장감으로 시종일관 독자를 이끌어간다. 또한 지극히 절제되어 나타나는 스승 석담의 심오한 뜻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곳곳에 묵향처럼 스며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천재는 천재가 알아보는 법이다. 일찍부터 도근(道根)이 막힌 채 재기(才氣)가 승한 제자의 솜씨를 염려한 석담은 아침에 붓을 쥐기 시작하여 저녁에 자기 솜씨를 자랑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환쟁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들이 한두 해면 읽고 지나갈 소학을 몇 년씩이나 읽도록 했고 열 셋이나 된 그를 소학교에 집어넣어 자신의 학문과는 다른 길로 가길를 원했다. 그러나 학비를 도와주겠다는 당숙의 호의도, 신문학에 대한 동경도 외면한 채 자기 곁에 남아있자 그를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혹독하게 단련시킨다.

 

그러한 석담의 깊은 뜻을 읽지 못한 고죽은 스승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모와 그에 못지 않은 격렬한 미움으로 뒤얽힌 애증의 한 세월을 보낸다. 유독 자기에게만 냉정하고 가르침에 인색하다고 느낀 고죽은 스승에 대한 반발과 조급한 자기 성취감에 빠져서 몇 번이나 뛰쳐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결국 스승의 문하를 뛰쳐나온 고죽은 오로지 붓끝과 손끝만을 연마한 솜씨로 선인들의 오묘한 경지를 흉내내면서 세인들의 칭찬에 휩싸여 자유분방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일찍이 석담이 그를 받아들이기 주저했으며 생전 내내 경계하고 억눌러왔던 그 예인적인 기질이었다.

 

그러나 현세적 출세에도 불구하고 오직 쓰고 또 쓰는 일에만 빠졌던 열병과도 같은 몰입에서 절망과 공허, 깊이 모를 허망감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이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드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만인의 칭송보다 한 사람의 채찍임을 고죽에게서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안일함에 자꾸만 빠져드는 내 허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담의 가르침은 늘 짧고 명쾌했다. 고죽의 가슴에 오랫동안 원망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스승이 가르침에 인색했던 것은 선인들의 가르침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필요치 않았을 뿐이었다. 석담의 고가에 박혀 이미 다 거쳐온 것들로 여겼던 여러 서체를 다시 섭렵하면서 비로소 스승이 그토록 가르침에 말을 아꼈던 이유를 깨닫고 스승을 그리워하는 대목은 오래도록 가슴을 적셔왔다.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워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를 옴 몸으로 느끼게 해준 대목이기도 했다.

 

고죽은 몇 달 동안 화방을 순례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있는 대로 거두어들인다. 그 작품들은 일생동안 자신을 속이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온 것들로 남겨두면 뒷사람들까지 속이게 된다며 모두 불태우게 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고죽의 이러한 자기정리의 철저함은 스승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익힌 장인정신이 아닌가 싶다.

 

매죽(梅竹)논쟁, 예도(藝道)논쟁 등 석담과 고죽의 예술관은 안타까울 정도로 수없이 부딪친다. 그러나 "관상명정은 네가 써라." 하고 이들 사제간의 일생에 걸친 애증 편력을 아는 운곡이 입관 후에야 돌아온 고죽에게 눈물을 쏟으며 전해준 석담의 유언은 이 작품의 압권이다. 그것은 불길 속에서 찬란한 금빛 날개와 힘찬 비상으로 솟아오르는 금시조보다 더 진한 떨림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작위적인 인상을 짙게 풍겼던 오대산 기행의 흠까지도 말끔히 없애주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일고 있는 순수와 참여의 뜨거운 논쟁에 대한 비판까지도 선명하게 제시해주었다.

 

금시조는 꼼꼼히 읽으면 오락적 재미 이상의 소득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석담의 정제된 가르침은 물론, 고죽이 일생을 통해 실패를 거듭하며 깨달았던 교훈을 실패의 소모와 고통 없이도 얻을 수 있음이 그것이다. 반세기 가깝게 명성을 누려온 대가가 평생동안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 또한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고죽의 피흘림과 방황은 이제 오로지 내 몫이다. 내가 일생을 골몰하여 이루고자 하는 내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피나는 장인정신으로 매진해야 할 것인가. 석담처럼 가르쳐줄 스승도 없는데...

2009.02.04 09:57ⓒ 2009 OhmyNews

금시조 - 다시 읽는 이문열

이문열 지음, 고성원 그림,
맑은소리, 2010


#석담스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