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너무 힘들어, 잠이 오질 않아!

[한 편의 시와 에세이] '백수' 대신 '이슬 먹고 사는 남자'라 불러줘

등록 2009.02.19 12:00수정 2009.02.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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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너무 힘들어 올해 새 봄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두 다리 쭈욱 뻗고 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올해 새 봄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두 다리 쭈욱 뻗고 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를이종찬
▲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올해 새 봄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두 다리 쭈욱 뻗고 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를 ⓒ 이종찬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이슬을 먹기 시작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잠이 오질 않아서, 괴로워서,

내 잔소리 때문에, 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

어느 날부터

그는 이슬이 더 이상 이슬이 아니라며 참이슬로

바꿨다

이슬은 이슬 그 이상이 되었다

그가 물 마시 듯 하는 이슬

그의 유일한 위로이자 밥인 이슬

내 잔소리 뒤로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 꼭꼭 감추어놓고

몰래 마셔대는 이슬

 

너 없인 살아도 이슬 없인 못 산다는 그

나는 지금 이슬과 싸우고 있다

 

-천금순, '이슬' 모두

 

며칠, 이 세상을 꽁꽁 얼어 붙이던 반짝추위가 물러가고, 들녘 곳곳에 봄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만치 새봄이 다가오고 있는 데도 이 세상살이는 땡겨울 찬바람 속인 듯 차갑기만 합니다. 서민들은 기를 쓰고 불황을 이겨내려고 발버둥 쳐도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서민들 힘으로는 지구촌 곳곳을 휘젓는 경기침체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7일(화) 오후 2시. 살가운 벗을 만나기 위해 청량리에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량리 우체국 곁에 있는 작은 골목에 있는 허름한 부대찌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낮부터 막걸리라도 한 잔 해야 만이 일자리 잃은 백수들이 겪어야 하는  이 지독한 돈가뭄을 그나마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속이 터져 술을 끊을 수가 없어

 

그날, 우리는 부대찌개에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며 밀린 세금 타령, 방세 타령, 취업 타령 등을 자잘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곁에 우리처럼 앉아 낮술을 마시는 오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얇은 지갑 때문에 술값마저 아까워 술을 끊으려 해도 속이 터져 술을 끊을 수가 없어. 술마저 끊으면 미쳐 나갈 지경이야"라고 혼자 뇌까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어찌나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지 막걸리 한 병을 그 사내한테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술독에 빠져서 지내시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아이들 생각도 하셔야죠?"라며, 제 딴에는 위로를 하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당신이나 나나 피차 같은 백수나 반백수 처지인 것 같은 데 뭘"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저 또한 요즈음 일거리를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사내처럼 낮술을 마시며 살가운 벗에게 '어떡할까? 어찌하면 좋을까?'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다가는 그 사내처럼 아예 술독에 빠져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사내도 오죽 답답했으면 낮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었겠습니까.

 

백수 올해는 또 서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백수올해는 또 서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이종찬
▲ 백수 올해는 또 서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이종찬

 

'백수'란 말 대신 '이슬 마시는 남자'라 불러줘

 

천금순 시인은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이슬을 먹기 시작했다 / 사는 게 힘들어서, 잠이 오질 않아서, 괴로워서, / 내 잔소리 때문에, 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라고 말합니다. 저 또한 '이슬'(소주) 대신 막걸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시고 있습니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는 핑계를 대면서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말 잠이 오질 않을 것만 같습니다.

 

시인 남편은 아마 '이슬'이란 상호가 적힌 소주를 즐겨 마시는가 봅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이슬이 더 이상 이슬이 아니라며 참이슬로 / 바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시인 남편은 소주를 '이슬'로 여기며,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나 봅니다. '백수' 대신 '이슬 마시는 남자', '희망 마시는 남자'로 불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 남편은 아무리 이슬을 마셔도 참 세상이 오지 않자 '참이슬'이란 상호가 적힌 소주로 바꿔버렸나 봅니다. 오늘도 시인 남편은 '이슬'이 아닌 '참이슬' 같은 세상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또한 '이슬'과 싸우고 있습니다. 시인도 남편에게 '참이슬' 같은 세상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수 '참이슬' 같은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백수'참이슬' 같은 세상이 어서 오기를 이종찬
▲ 백수 '참이슬' 같은 세상이 어서 오기를 ⓒ 이종찬

 

불황, 경기침체, 이런 말들은 새싹들 밑거름 되었으면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랜 경기침체가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지는 몰라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어 닥친 경기침체는 정말 힘이 많이 듭니다. 앞으로 가난한 서민들은 어떡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다시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어야 양극화가 없는 새로운 세상이 올까요. 아니면 정부를 믿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도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올까요.

 

저만치 새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해 새 봄에는 제발 불황이니, 경기침체니, 환율상승이니, 유가 상승이니, 하는 이런 말들은 예쁘게 솟아오르는 새싹들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새 봄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두 다리 쭈욱 뻗고 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따스한 봄볕처럼 쭈욱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이슬'을 통해 백수로 살아가는 남편 아픈 속내를 엿보는 천금순 시인은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계간 <작가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마흔 세 번째의 아침> <외포리의 봄> <두물머리에서> <꽃그늘 아래서>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2009.02.19 12:00ⓒ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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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천금순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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