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뿐 아니라 신주까지 들여다보다

[정월 대보름의 전남 담양 창평 슬로 시티 체험] ⑥<미암일기>

등록 2009.02.27 10:26수정 2009.02.2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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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사와 함께 삼지천 마을을 또 한 바퀴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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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 앞의 한 판 농악놀이 ⓒ 이상기


잣세 교수와 작별을 하고 다시 마을 광장으로 나가 보니 농악놀이가 한창이다. 애들은 주변에서 개고다리도 타고 굴렁쇠도 굴리고 자전거도 탄다. 어른들은 윷도 놀고 장기도 하고 인절미도 만든다. 2월의 오후를 여유 있게 즐기는 모습이다. 마침 그때 우리 팀이 전남 도지사와 함께 고재선 가옥으로 가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그동안 잣세 교수와 만나느라 우리 팀과 떨어져 있던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고재선 가옥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도지사 일행은 벌써 다음 고가인 민박 한옥에 가 있었다. 똑같은 집을 두 번째 보는데도 아들 고가가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대상과 자연이 이렇게 달라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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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를 맛보는 박준영 도지사 ⓒ 이상기


박준영 도지사는 수행자들에게 삼지천 마을을 보존하는 방안, 관광을 활성화하는 방안 등에 대해 지시를 했다. 또 우리 팀이 멀리까지 와서 대보름 동제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고마움도 표시한다. 도지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주민들의 의견도 청취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요즘 도지사가 선출직이 되어서 주민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암의 흔적이 서린 노루골(獐洞)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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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물전시관 ⓒ 이상기


삼지천 마을을 한 바퀴 돌고난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대덕면 장산리로 떠난다. 삼지천 마을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장산리는 조선 중기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 선생이 말년에 터를 잡고 살았던 마을이다.

선생은 원래 해남 출신이다. 26세 되던 1538년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58세 되던 1570년 처가인 이곳 노루골로 낙향을 한다. 이후 그는 서울과 담양을 오가며 생활하다 1577년 한양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먼저 담양으로 운구되었다가 나중에 선대 산소가 있는 선산에 묻혔다. 그가 선산 유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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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우리 회원들 ⓒ 이상기


장동 마을 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먼저 유물전시관으로 간다. 이곳에는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미암 선생의 후손인 유언적 교수가 나와 계신다. 사학을 전공한 유 교수의 설명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30분 가까이 미암 선생의 삶과 정치관, 이곳에 있는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는 먼저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가 본다. 지금 한창 공사중이어서 유물은 아직 전시되고 있지 않다. 공사 상황으로 보아 금년 여름이나 되어야 개관할 것 같다. 전시관을 보고 북쪽 문으로 나가 보니 연못이 있다. 연못 한가운데 섬에는 모현관이 세워져 있다. 저곳에 그 유명한 <미암일기> 원본과 목판(보물 제260호)이 함께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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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쪽에서 바라 본 연계정 ⓒ 이상기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언덕 위에 연계정(漣溪亭)이 보인다. 연계는 미암이 이곳 장동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마을 앞개울에 붙인 이름이다. 연계란 구불구불 굽이치며 흐르는 시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현관 너머 마을 쪽으로는 미암사당이 있다. 나는 연계정을 먼저 보고 모현관을 찾아 미암일기를 본 다음 미암사당을 찾아 참배도 하고 구경도 할 예정이다.  

미암이 지은 연계정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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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정의 측면 ⓒ 이상기


1575년 미암은 이곳 노루골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연계정이라 불렀다. 그는 이때부터 연계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유희춘 선생의 호는 초년의 미암과 말년의 연계 두 가지이다. 연계정 가는 길 좌우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에 금줄이 처져있다. 그리고 길 양쪽에는 황토를 뿌려 악귀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대보름 동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준비를 한 것 같다.

연계정에 오르니 유물전시관과 모현관이 내려다 보이고 왼쪽으로는 노루골이 펼쳐진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연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방이 두 칸을 차지하고 나머지 네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방의 문간 위에 '연계정중건추기(漣溪亭重建追記)'가 있어 그 역사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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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정 내부 ⓒ 이상기


이 글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1916년(丙辰)에 썼다. 기우만은 중건기의 전반부에서 미암 선생의 인품과 학풍 그리고 정치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중반부에서 미암이 후학에게 도를 가르치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고 쓰고 있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옛터에 중건하였다고 말한다. 후세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 모여 강학도 하고 선생의 학풍을 이야기했다고도 한다. 이제 다시 정자를 세우니 공이 세운 공덕을 이어받아 영원히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글을 끝맺고 있다.

"연계에 연해서 정자가 있다. 미암 선생이 지었다. 선생의 학풍은 주자를 따랐다. 재주가 갖춰져 왕을 보필했다. 임금에게는 충성스러운 말을 아뢰고, 궁궐을 벗어나서는 경관을 즐겼다. 그리고 행동은 배운바와 같았다. […] 세상을 살아감에는 도에 어긋남이 없었고, 도를 아는 대로 행했다. […] 자신이 깨달은 도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정자를 짓고 그 도를 가르쳤다."

모현관의 <미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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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를 보관하고 있는 모현관 ⓒ 이상기


모현관은 연계정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현대식 건물이다. 이곳이 바로 미암 유희춘 선생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일종의 수장고이다. 이 건물은 섬 안에 있어 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다. 연못에 건물과 그 옆의 소나무가 우아하게 반영되어 멋이 있다. 우리는 유 교수의 안내로 다리를 건너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모현관 안은 전기가 들어오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다. 가장 중요한 <미암일기>가 가운데 책 상 위에 놓여 있고 주변 벽으로는 목판이 세워져 차곡차곡 배열되어 있다. 먼저 유 교수는 <미암일기>를 보여준다.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가 <미암일기>를 보려니 공간도 좁고 각자에게 돌아가는 시간도 별로 없다. 시간이 있으면 미암 선생의 일기를 좀 읽어보고 싶지만 필체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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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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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 목판 ⓒ 이상기


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미암일기>는 조선 선조(宣祖)때의 학자 미암 유희춘의 친필일기이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가 즉위(1567)한 정묘(丁卯) 10월 1일부터 선조 10년(1577) 5월 13일까지 쓴 일기로 중간에 몇 군데 빠져있다고 한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을 뿐 아니라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높다.

일기에 본인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당시 상류층의 학자들의 생활상황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이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일기가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사료로 쓰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으로 인해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불타 없어져 이 책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가 <선조실록>의 첫 10년의 사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암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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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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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룡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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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도 ⓒ 이상기


모현관을 보고 나온 우리 일행은 마지막으로 마을 쪽에 있는 미암사당으로 간다. 미암사당은 전남 민속자료 제36호로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전인 1579년 처음 지어졌으며 임란 후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것은 사당에 벽화가 그려졌다는 점이다. 외벽에 3개, 내벽에 10개 내외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외벽의 그림은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이다. 두 마리의 백학이 그려진 백학도는 미암의 고고한 절의를 나타낸다. 등룡도는 두 마리 물고기가 도약하는 모습이다. 마침내 뜻을 얻어 현관으로 등용되는 화려한 관도를 상징한다. 봉황도는 두 마리의 금계가 그려져져 있다. 일가의 화려한 출세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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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부의 화조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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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부의 묵죽도 ⓒ 이상기


채색은 흙벽 위에 회칠을 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채색 기법이 전통적인 사찰 벽화와는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적 건축물인 사당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작품성보다는 희귀성이나 상징성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사당 안에도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 화조도와 묵죽도이다. 화조와 묵죽은 조선시대 그림에서 즐겨 채택한 소재이다.

이들 벽화의 한 가운데 북쪽으로 위패와 신주가 모셔져 있다. 신주는 검은색과 다홍색으로 되어 있다. 검은색이 미암 유희춘 선생의 신주고 다홍색이 그의 부인인 홍주 송씨의 신주다. 유 교수는 이들 위패와 신주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마디로 400년이 넘은 역사와 세월이 담겨있는 귀한 유물이다. 우리는 이들 신주와 위패를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만나기 쉽지 않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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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선생과 그의 부인 홍주 송씨의 신주 ⓒ 이상기


이제까지 우리는 담양에서 조선시대 중기 명문가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대보름 동제에 참석하는 일이 주목적이었다. 그런데 고서면의 명옥헌, 창평면의 고씨 고가, 대덕면의 미암사당을 보면서 조선시대 옛 선현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으로 본질이 바뀌고 말았다. 대보름 동제에도 참여하고, 이 지역의 문화유산도 보고, 그들이 남긴 흔적도 찾아보고, 정말 대단한 체험이다.

이제 창평으로 돌아가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 우리는 다시 장동 마을회관 앞으로 간다. 그곳에 차가 있기 때문이다. 회관에는 '아름다운 노루골(獐洞)'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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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너머로 보이는 노루골 ⓒ 이상기


"노루골은 마을 바로 뒷산이 노루 형상이라 하여 지어졌답니다. 사람들이 흔히 노랑골로 부르는 것은 노루골로 불러오다 변형된 이름이지요. 마을 중간 지점에 있는 연못을 기점으로 윗마을을 노루골, 아랫마을을 안양골이라 하는데 전체적으로 노루골 또는 장동이라 부른답니다."
#미암 유희춘 #미암일기 #대덕면 장산리 #연계정 #미암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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