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복날의 손수레 4
"그럼 은하캐피탈 거, 9월까지 꼭 갚으세요. 안 갚으면 경매 들어갑니다."
저쪽의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내가 실은 대하소설 <북한강>을 쓴 사람입니다. 두 달만 더 기다리면 될 겁니다. 책 한 권 내면 1쇄 인세로 그 돈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그때 가봐야 알 일이었다. 200이 아니라 20도 못 벌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뜻밖이라는 듯 물어왔다.
"예? 정말 <북한강>을 쓰신 작가님이세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 유명한 작품을 쓰신 작가님이 200만 원 때문에…"
"IMF 이후에 엉망이 됐어요. 1쇄 5000부를 찍던 출판사들이 3000부를 찍는 것도 몸 사리고 있고… <북한강>을 낸 출판사가 다른 사업을 하는 데 신경을 쓰느라 결국 출판사를 접는 바람에 작가 입장에서는 인세 수입이 뚝 끊기게 됐지요. 잘 아는 작은 출판사 사장들이 자기네서도 내자고 하면 장편이든 콩트든 한 뭉치 두 뭉치 원고를 주긴 했는데 출판사가 작으니까 홍보와 마케팅이 약해서 그런지 잘 안 나가더라구요."
대한민국 문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선호는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돈을 참 많이 떼먹힌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잡지사 < COOLWIND >로부터 3개월간 연재 원고료 200만 원을, 또 한 번은 출판사 풀뿌리미디어로부터 500만 원을 떼먹혔었다. 재일교포가 운영하던 < COOLWIND >는 자본주(資本主)이던 일본의 한 출판사가 손을 뺐기 때문에 도산해서 원고료를 안 준 경우고,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풀뿌리미디어는 인세를 아끼기 위해서 "책만 만들어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무명작가와 무명시인들의 기획소설, 기획시집을 무더기로 펴내는 식의 무리한 경영을 하다가 선호에게 인세를 못 만들어 준 경우였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선호는 또 당했다.
자신이 편집주간으로 일하다가 비상근 편집위원으로 바꾸어 일해 주고 있던 격주간 애완동물 신문 <애니페트>로부터 원고료 200만 원을 떼먹힌 것이었다. 격주간 애완동물 신문 <애니페트>는 계속된 불황으로 광고료 결제가 여의치 않자, 서둘러 쇼핑몰로 전환하고 그런 몹쓸 일을 자행(恣行)했다. 신문 발행에 자본을 대던 인물은 한반도과학문화재단 위철산 미디어사업본부장. 그는 <애니페트>를 창간한 발행인 김남구를 전무로 내려앉히고 자신의 지시를 받던 여성 기획이사 이진현을 사장으로 올려놓았었다.
과거에 연재소설 건으로 인연이 있던 잡지 전문가 김남구의 부탁으로 <애니페트>에 주간으로 영입되었다가, 몇 달 뒤 창작 시간을 벌기 위하여 비상근 편집위원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선호는 여사장 이진현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주간님, 좀 도와 주셔야겠어요."
급한 성격의 이진현 목소리가 더욱 빨라져 있었다.
"원고 쓰는 것 말고요?"
"기획편집회의 좀 주관해 주세요."
"기자들끼리 잘 하더군만요 왜?"
"걔들, 말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창간 1주년 기념호 취재와 편집을 기자들에게 지시하며 좀더 볼 만하게 만들기 위하여 선호는, 모래내시장 입구에서 537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암역으로 간 다음, 거기서 이번엔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5호선으로 갈아타며 퇴계로 5가까지 이동하는 이른 아침 출근을 한동안 이어나갔었다.
이따금 <애니페트>에 들르던 자본주 위철산은 선호에게
"주간님, 신문 잘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말까지 건넸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대체 사람 속을 어떻게 헤아려야 옳은 건지… 어느 날 선호가 사무실로 갔더니, 위철산의 지시를 받던 이진현 사장은 선호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아예 강남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위철산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하여 급료를 마련해 달라 하였더니, 위철산이 벌벌 떨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주간님은 못 받은 돈이 겨우 200이지만, 저는 손해 본 게 2억이 넘습니다. 김남구한테 속아서, 아파트를 담보로 2억을 빌려다 댄 거예요."
"발행인을 전무로 내려앉히고 이진현 씨를 사장으로 임명한 건 누굽니까? 그리고 저에게 일을 부탁한 건 김만구 발행인이 아니라 이진현 사장입니다."
"그럼 이진현 사장한테 받으세요."
사업의 전망이 희미하니 노동의 대가를 못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주간님이 편집국을 맡은 이후부터 신문의 퀄리티가 높아졌습니다. 광고료만으로도 제작비가 나옵니다"라고 김남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선호가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일이라고는 없었다. 문제는 애완동물 월간지까지 한꺼번에 발행하면서 드는 제작비와 인건비의 상승과 잡지 마케팅의 저조에 있었다. 선호는 위철산에게 "이런 똥개만도 못한 양반"이라고 내지르려다가 꾹 참았다.
이진현 사장에게 전화해 보았지만 그녀도 발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진현은 언제 돈을 해주겠다고 했다가 막상 그날이 되자, 이상한 걸 먹고 갑자기 미쳐버린 여자처럼 흥분하며 말을 내질렀다.
"김남구가 발행인이죠? 그 사람한테 받으셔야죠! 저는 법으로 대응할 준비가 다 돼 있어요!"
[계속]
덧붙이는 글 | 몇 년 전에 완성해 놓고 출간하지 않고 있던 소설인데,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덧붙여서 많은 부분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2009.03.03 17:3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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